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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복의 보이차기

완복의 보이차기

보이차 이름은 천하에 두루하니 맛이 가장 진하며 수도에서 더욱 중히 여긴다 완복이 운남에 와서 운남통지를 살펴봐도 그 상세함을 얻지 못하고 다만 이르기를 유락, 혁등, 의방, 망지, 만전, 만살 등 여섯 차산에서 나는데 의방, 만전의 것이 맛이 가장 낫다 이를 뿐이다 완복은 보이부가 옛날 서남오랑캐의 가장 변두리땅이 되어 역대로 내지에 붙은 적이 없음을 고려하고 단췌의 진해우형지에 이르길,


"일찌기 보이차가 어느때부터 드러났는지 모른다 송 범성대가 말하길 남쪽으로 건너오고 계림의 정강군이 차로 티벳의 말과 바꾸었다 했으니이는 진남에는 차가 없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석의 속박물지에는 일컫기를..."


이석 또한 남송사람이다 본조의 순치 16년 운남을 평정하고 나추가 귀부했다가 바로 반란해 복주되고 두루 원강통판에 예속되어 이로 소속한 보이 등의 곳에 여섯 큰 차산의 땅을 들이어 보이부를 설치하고 아울러 분방分防을 설치했다.

사모동지가 사모에 주둔하니 사모는 부의 읍치에서 120리 떨어져 있다 소위 보이차라는 것은 보이부 경계안에 소산하는 것이 아니고 대개 속한 사모청의 지경에 나는 것이다 .

사모청 관할에 차산의 여섯곳이 있으니 의방, 가포, 습공, 만전, 혁등, 역무라 말하여 통지에 실린 것과 이름이 서로 다르다 .완복은 또 공납차의 서류를 검사하니 매년 공납차가 포정사의 창고 동식항목 아래에 상례를 두어 은 일천냥을 사모청이 수령해 가서 따는 판공비로 굴려 쓰고 아울러 차를 거두는 주석병관과 주단, 목갑및 나무상자 등의 비용을 두는 것을 알았다 .

그 차가 사모에 있으니 본지의 신선한 차를 딸때 모름지기 서너근의 신선한 차로 막 한근반차를 만들수 있다 매년 공납에 갖추는 것은 닷근중의 단차, 세근쭝 단차, 한근쭝 단차, 넉량쭝 단차, 한냥닷전쭝 단차이고 또 병에 아차, 예차를 채우고 갑에는 차고를 채워 모두 8색이니 사모동지가 은을 수령해 이어 받들어 판공한다 .


사모지고에 이르길, 그 다스리는 곳인 혁등산에 차왕수가 있어 뭇 차나무 보다 비교적 높고 큰데 토인이 차 딸때를 맞으면 먼저 술과 단술을 갖춰 여기에 제례를 드린다 하고 또 이르기를 차가 여섯 차산에 나니 기미가 토성에 따라 달라 붉은 흙 혹은 흙속에 잡석이 가장 나아 먹이를 풀고 추위를 흩으며 독을 푼다 이월간에 꽃부리의 가장 잘고 흰 것을 따니 모첨이라 이르고 이로 공납차를 만든다.

공납 뒤에야 민간에 판매가 허락되니 따서 찌고 비비어 단병을 만든다 그 잎이 좀 펴여져도 오히려 오히려 여린 것은 아차라 이름하고 삼사월에 따는 것은 소만차라 이름하고 칠팔월에 따는 것은 곡화차라 이름하고 크고 둥근 것은 긴단차라 이름한다 작으면서 둥근 것은 여아차라 이름한다.

여아차는 부녀가 우전에 따서 얻는 것인데 곧 넉량쭝의 단차다. 그 상인의 손에 들어서 겉은 잘고 속은 거친 것은 개조차라 이름한다. 장차 비벼 단병을 만들때 미리 그 안의 굳세고 누러면서 말리지 않은 것은 택한 것을 금옥천이라 이름하고 그 굳게 맺어 풀리지 않는 것을 흘답차라 이름하니 맛이 극히 두텁고 얻기 어렵다.

차를 씨뿌리는 집은 김매어 때가 이르기를 준비하는데 곁에 초목이 나면 맛이 열등해 팔기 어렵다 혹 다른 물건과 그릇에 같이 하면 그 기가 물들어 마시기를 감당치 못한다

*물론 이석 또한 남송시대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가 쓴 속박물지의 은생부의 차에 대한 내용은 직접 견문이 아니고 당나라 함통년간 무렵의 견문기록을 그대로 옮겨 실은듯하다 아마 단췌가 이석의 기록을 당나라때 것 처럼 본 것도 그 글이 주로 남송 이전의 사실이 기록된 기존의 서지에서 끌어 따모아 옮겨적은 성질의 것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장홍의 진남신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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