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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차(斗茶)

투차(斗茶)

중국고전이나 중국무협을 읽다보면 흔히 접할 수 있는 중국의 역사상 등장하는 고급취미생활로는 “투계 鬪鷄”, “두우 斗牛”, “투차 斗茶” 가 있다。말로는 고상하게 그렇게 표현하지만 닭싸움, 소싸움, 차겨루기라고 할 수 있겠다。이글을 읽는 분들이 혹시 중국에 가신다면 반드시 투차라는 단어를 기억하셨다가 중국인 친구들에게 이 풍속에 대하여 가르켜달라고 해보라..그럼 그들은 그대를 분명히 다른 눈으로 쳐다 볼 것이다。중국친구를 사귀는데 이보다 좋은 비결을 없다고 생각한다。그들은 하루에 엄청난 양의 차를 마신다.

음다(飮茶) 풍속이 예술방향으로 발전하여 차의 품종을 가리는 취미인﹐품다(品茶)﹔品茶에서 다시 진일보한 발전형태가 斗茶라 할 수 있다。투차의 유래는 대개 당대(唐代)로 보는데 지금은 철관음으로 유명한 복건성의 다향에서 재배되어 궁궐에 공다(貢茶)한데서 유래한다。매년 봄이도면 새호운 차가 조성된후에﹐다농茶農﹑다객茶客 들이 새로운 차의 우량과 열세를 순서적으로 구분하는 일종의 축제행사를 벌였다。이들은 자신들이 아는 기교技巧﹑斗輸의 特點﹐부자들의 취미생활화한 기호와 남들의 기예와 다툰다는 도전성에 입각하여 대결을 벌였다。이런 일장의 투차에는 반드시 승패를 가렸는데﹐그날의 승패를 많은 시민들와 유관 유지들이 주관하였다고전해진다。당(唐)대에서는 이러한 다두를 가르켜서 “명전 茗戰”﹐송(宋)대엔 “투차 斗茶”라고 불렀으며﹐이런 투차는 강한 승부욕을 자극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서 과열되는 색채를 보였으며﹐기실 일종의 품평형식과 사회활동의 하나로 여겨졌다。

투차의 승부결정방식의 표준。

하나, 탕색(湯色)즉 차의 색깔。일반적인 지표는 순백(純白)을 상등품으로 본다﹐청백(靑白)﹑회백(灰白)﹑황백(黃白), 이런색을 하등으로 삼았다。색이 순백에 이르면﹐어린 눈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상질로 삼았다﹐증(蒸,찔 때)시에 불을 알맞은 온도에서 잘 볶아야﹐색이 청색으로 잘 나타나며﹐불이 약하면﹔회색으로 변하거나(色泛灰)﹐너무 강하면﹔황색으로 나타난다(色泛黃)﹐즉 적당한 취급을 하여야만﹔색이 홍색을 띠는데(色泛紅)﹐불의 조정에 좋은차가 만들어지는 관건이라 할 수 있다。

두나﹑탕화(湯花)즉 잔에 넣어 부었을 때에 이는 거품(泡沫)을 말한다。탕화로서 우열을 결정하는 표준으로 삼는다﹕첫번째 탕화의 색을 본다。탕화의 색택(湯花的色澤)과 탕색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이로 인하여 탕화의 색택표준과 탕색의 표준이 같아야한다﹔두 번째는 탕화를 부은후에﹐물위에 뜨는 흔적의 이르고 느림을 살피는데 있다﹐빨리 변화가 이르면 지게되고﹐늦게 색이 변하면 이기는 것이다。이러한 것은 차를 문지를 때(硏石+展) 가늘고 매끄러운 것(細月+貳)﹐점탕(點湯)﹑좋은 시기에 비비기﹐탕화균세(湯花勻細)하여 살피는데﹐이를 이르러 “냉죽면 冷粥面”이라하고﹐새처럼 오그라들면서 잔가장자리에 모이거나 흩어지는 형태를 살폈다。이중에 가장 우수한 것은﹐일명 “교잔 咬盞”이라 부른다。반대로 나쁜 것은 교잔하지 않고 빨리 탕화가 흩어진다。탕화가 산(散)하는 것은 탕과 잔에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지방마다 “수흔 水痕”(茶色水線, 다색의 물색깔)이 다르다。이로 인하여﹐수흔의 출현의 늦고 빠름으로 탕화의 우열을 논하는 증거가 된 것이다。

투차는﹐많은 사람보다는 보통 두사람이 겨루는데 “사살,手+斯殺”이라하고﹐“三斗二勝” 즉 삼전이승하면 이긴 것으로 삼았다﹐승부의 단위를 가르키는 술어(術語)를 일명 “水”라고 하였으며﹐두가지 종류의 다엽(茶葉)을 겨루는 것을 일컬어 “상차기수 相差幾水”라 불렀다。범중암(范仲淹)의《투차가 斗茶歌》가운데 당시의 투차의 정황을 철저히 묘사하였는데﹕“其間品第胡能欺﹐十目視而十手指。勝茗登仙不可攀﹐輸同降將無窮恥。”하였다.

“그간의 품다함에 있어서 그 누가 속일 수 있겠는가﹐열사람이 열손가락으로 지켜본다。이기면 가히 등선하듯 이름을 드놓일 수 있었고﹐진다면 그 수치심이 무궁하였다。”

     玉鑒塵生,鳳奩香珍。懶蟬鬢之巧梳,閉縷衣之輕練。苦寂寞於蔥宮,
  但注思乎蘭殿;信標梅之盡落,隔長門而不見。況乃花心颺恨,柳眼弄愁。
  暖風習習,春鳥瞅瞅。樓上黃昏兮,聽鳳吹而回首,碧雲日暮兮,對素月
  而凝眸。溫泉不到,憶拾翠之舊事;閒庭深閉,嗟青鳥之信修。緬夫太液
  清波,水光蕩浮;笠歌賞宴,陪從宸修。奏舞鸞之妙曲,乘畫(益鳥)之仙
  舟。君情繾綣,深敘綢緞。誓山海而常在,似日月而靡休。何期嫉色庸庸,
  妒心沖沖,奪我之愛幸,斥我乎幽宮。思舊歡而不得,相夢著乎朦朧。度
  花朝與月夕,慵獨對乎春風。欲相如之奏賦,奈世才之不工。屬愁吟之未
  竟,已響動乎疏鐘。空長歎而掩袂,步躊躇乎樓東。

高風亮節江梅妃

  梅妃是中國歷史上家喻戶曉的人物,她的品行情操為歷代文人墨客
所頌揚。梅妃姓江名采蘋,唐玄宗皇帝的妃子,莆田江東人,人稱江東
妃。梅妃生于唐開元10年(公元722年)。父仲遜,封鎮國將軍,后女
為妃,貴封金紫光祿大夫(正三品)。她自幼聰穎,一經指點,便可融
會貫通,5歲能讀書,7歲會作文,9歲可誦解《詩經》,14歲善吟詩作
賦,自比謝道韞,曾作《蕭蘭》、《梨園》、《梅花》等七賦,遠近傳
播,名聲大振。
  唐開元25年(公元737年),16歲的采蘋姑娘才貌雙絕,知書達禮
,被選入宮,很受玄宗皇帝寵愛。她喜淡妝雅束,酷愛梅花,所居宮內
遍植梅樹,稱為“梅園”。常常賞梅賦詩,留連忘返,帝甚愛之,親筆
題匾梅亭,封為梅妃,賜東宮正一品皇妃(錄《興化府志》、《福建通
志﹒烈女傳》)。莆田諸女盡封孺人,于歸俱賜鑾駕。
  梅妃心系庶民,受寵不謀私。開元25年至27年,梅妃深受玄宗寵愛
,她品行無私,不迷戀奢華權勢,始終以《二南》所頌揚的道德觀主宰
心靈,常勸明皇勤政,效法貞觀之治,重現開元盛世(選自《興化攬勝
》)。玄宗皇帝高興地說:以往的嬪妃巴不得討好聯,想不到愛妃如此
識大體。
  梅妃品德高尚,得勢不求利。梅妃入宮后,絕不為自己的家族多求
恩澤。一次,唐明皇帶她到勤政殿觀看魚龍百戲,回來時興致很高,欲
封官于其家族,顯示皇家恩澤。梅妃答曰:“家中深惠皇恩,愿陛下以
蒼生為重,施恩百姓”(錄《興化攬勝》)。因此江家一向不甚富豪,
曾因救濟災民傾家蕩產,歷代傳為佳話。
  梅妃志節清高,國破不失節。開元28年,楊玉環入宮,妒梅妃。據
莆田縣志載,心地善良的梅妃終不是結黨營私、玩弄權朮的楊貴妃的對
手,被迫遷往上陽宮,難以和玄宗見面,于是作《樓東賦》以表心思,
玄宗觀后甚念,又怕楊妃,深使梅妃絕望。一天帝在花萼樓會見外夷進
貢的來使,并命人封珍珠一斛密賜梅妃。梅妃辭不接受,寫下膾炙人口
的《一斛珠》以表心跡。天寶15年,安祿山兵陷長安,唐明皇西蜀避難
,楊貴妃命喪馬嵬坡。梅妃不愿棄國逃避,不屈亂賊,舍身殉國,終年
34歲。據《福建通志﹒列女傳》載:“長安收復后,明皇思念梅妃。下
詔知梅妃下落者,官加二級,錢賞百萬。后在溫泉池畔梅樹下掘得梅妃
遺體。玄宗視后,號哭不止,親自撰文吊祭,以妃禮易葬。賜封“浦口
宮”,春秋二祭。(錄江氏宗譜)
  梅妃品行無私,高風亮節為歷代名賢所頌揚。宋著名詩人、史學家
劉克庄,清大理卿郭尚先,監察御史江春霖,汀洲知府伊秉綬和大文豪
郭沫若等紛紛作詩題匾歌頌﹔明太守王光業書寫“荔子甲天下,梅妃是
部民”作府署聯引以為豪﹔“八一”電影制片廠、中央電視台、人民日
報﹒海外版、香港《大公報》、《文匯報》等都作過專題介紹。1997年
7月梅妃故里被中國文物學會、中國旅游學會、中國博物館學會、中國
風景名勝區協會評定為中國300個著名風景名勝旅游景區,并收入《全
國300個著名旅游景區大觀》一書向海內外發行。真是有人零落馬嵬無
廢塚,有人馨香浦口有璇宮。■江國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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