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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강릉 한송정/화랑들이 찾았던 차의 성지(차따라:3)

【0003】강릉 한송정/화랑들이 찾았던 ꡐ차의 성지ꡑ(차따라:3)

한국일보 97.05.20 27면 (문화) 기획․연재


◎ 차의 달 맞아 첫 공개

/ 차 달여 마시던  석지조

/ 중국보다 200년 앞서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 공군 부대 영내에 있는 한송정이 차의 달인 5월을 맞아 지난 16일 처음으로 일반에 개방됐다. 명산대천을 순례하던 신라 화랑들이 수련을 하며 차를 마시던 한송정은 차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성지처럼 받들어지는 곳. 또 화랑들이 차를 끓이던 「석지조(돌화덕과 돌연못)」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져 중국과 일본에서도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번은 구경하고 싶어하는 곳이다.

이날 강릉시립박물관(관장 김육기)과 강릉동포다회(회장 고숙정)는 한송정 주변 잔디밭에서 들차회를 열고 한송정 개방을 자축했다. 전국에서 모인 500여명의 차를 아끼는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 한 들차회에는 한잔 차와 다식을 앞에 놓고 한송정이 자랑스런 민족문화유산이자 우리나라 「차의 성지」임을 설명하는 순서도 마련됐다.

경포대와 함께 신라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사용됐던 한송정은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 연간(540~575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될뿐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다.

진흥왕때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사선」으로 일컬어지는 영랑 술랑 남석행 안상 등 네 화랑이 이 무렵에 활동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화랑도가 제 모습을 갖추는데 크게 기여, 결국 훗날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도록 초석을 놓은 화랑들이다.

한송정과 사선에 관한 글은 고려때 학자 이인로(1152~1220년)의 파한집」에 남아 있다. 이인로는 파한집에


「까마득 옛적에 사선 노닌 곳/ 푸르른 소나무 우뚝 서 있네

/ 차샘속 달만이 그때 그 시절/ 어렴풋 하나마 생각케 하네」


라는 시를 남겨 놓았다. 그는 또 「사선이 놀았던 한송정에는 그들을 따르던 3,000여명이 심은 소나무가 지금도 창창하여 마치 구름같다」는 글도 남겨 놓았다.

이날 들차회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거리가 됐던 「석지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다구. 한송정 석지조가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이제현(1287~1367)의 「묘련사 석지조기」에 남아 있다. 「후세 사람들이 석지조를 보지 못하게 될까 이 글을 남긴다」고 한 이제현은 석지조에 대해 「………그길로 한송정을 구경하였는데 그 위에 석지조가 있었다. 그 고장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옛 사람들이 차를 달여 마시던 도구로 어느 시대에 만든 것인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두 군데를 오목하게 파놓은 돌덩어리로 둥글게 판 곳은 불을 두는 곳이고 타원형으로 파놓은 곳은 차그릇을 씻는 곳이다. 또 조금 크게 구멍을 내어 둥근 데와 통하도록 해 바람이 들어오게 해두었으니 이름하여 석지조라 했다. 인부 10명으로 하여금 처마 아래에 굴려다 놓고 손님들을 청하여 앉힌 다음 백설처럼 시원한 샘물을 길어다 황금빛 움차를 달였다」고 했다.

중국에도 구리와 쇠로 주조한 「풍로」라는 석지조 비슷한 다구가 있으나 758년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한송정 석지조보다도 200년 가량 늦다.

역시 고려때 사람 이곡(1298~1351년)도 한송정 석지조에 관한 글을 남겼다. 이곡은 「………한송정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이곳 또한 사선이 놀던 곳이었는데 한송정에 유람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자 고을 사람들이 귀찮게 여긴 나머지 정자를 헐어 버렸다. 소나무 또한 불타버리고 오직 돌덩어리 한개에 차를 끓이는 화덕과 차그릇을 씻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놓은 석지조가 남아 있었는데 이는 사선이 차를 끓여마시던 다구라고 하였다」고 했다.

한송정은 원래 지금 있는 자리에서 조금 올라가 북쪽으로는 경포대, 남쪽으로는 안인이 내려다 보이는 해변가 낮은 동산 꼭대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중요한 군사시설물이 있어 지금 자리에 공군측이 약식으로 정자를 만든 것이다.

한송정에 남아있는 연단석구도 화랑들이 차를 끓일때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제현이 보았던 석지조와는 전혀 다르다. 1868~1870년 강릉부사로 있으면서 한송정을 둘러보았던 윤종의가 신라선인이 이곳에서 노닐었다는 얘기를 듣고 돌에다 글씨를 새겨놓은 것이 석지조로 잘못 알려져 왔던 것이다. 이 연단석구에는 가로 40㎝ 세로 10㎝ 깊이 8㎝의 크기의 홈이 파져있으며 홈 주위에는「한송정신라선인영랑연단석구」라는 음각글자가 있지만 이 돌은 비석받침일 뿐이라고 강릉시립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정항교(42)씨는 단정하고 있다.

강릉시는 올해안에 석지조를 복원할 계획이다. 군부대에서 약식으로 만든 한송정도 전국 차인들의 노력으로 조만간 제 모습을 갖추게 될 전망이다.

강릉의 차인들은 민족문화유산의 자랑거리인 한송정을 과감하게 개방한데 이어 앞으로 간단한 수속만 밟으면 민간인이 쉽게 출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공군부대 조치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김대성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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