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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2】태종의 스승 운곡 원천석(차따라:12)

【0012】태종의 스승 운곡 원천석(차따라:12)

한국일보  97,07,22 22면 (문화)


◎ 차향과 함께한 불사이군의 지조

/고려 멸망후 차와 벗하며 살던 치악산 기슭엔 태종임금이 찾아와도 외면한 기개가 전설로…

고려말은 격이 높은 차인이 많았던 시기였다.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TV연속극 「용의 눈물」에 나오는 이방원의 스승 운곡 원천석(1330~?)도 고려말, 조선초의 대표적 차인이었다.

태종의 스승이었다는 인연만으로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그는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을 고집, 조선조에 출사를 거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차 없이는 지낼 수 없었고, 차를 너무 좋아해 차와 관련한 시 10여수를 남기기까지 한 차인이라는 사실은 전혀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반가운 서울 소식 숲집에 전해 오니

/ 풀끈에다 새로 봉한 작설차라

/ 식사 뒤 한잔은 유달리 맛이 있고

/ 취한 나머지 세사발은 자랑할 만도 하네

/ 마른 창자를 축이어 속이 시원하고

/ 침침한 눈이 열려 앞이 환하구나

/ 차의 신기한 공 측량하기 어려워

/ 시 생각이 떠 오르고 잠을 청하기도 하네」


사백 이선차가 작설차를 보내 온 데 대해 그는 차의 효능을 꿰뚫은 시로 고마움을 전했다.

고려조에서 환갑까지 산 운곡은 고려가 망하는 것을 보고 치악산 서쪽 기슭 가래골에 누졸재라는 이름의 초가를 짓고 은거해 버린다. 이방원에게 주살당하기 전 삼봉 정도전이 그를 찾아 왔을 때는 한잔 술을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그러나 이방원이 임금이 되어 찾아 왔을 때는 피해 버린다. 임금이 찾아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운곡은 길가 강변에서 빨래를 하는 할머니에게 단단히 부탁한다. 『나를 찾는 사람이 오면 나는 왼쪽 변암쪽으로 갈 테니 할머니는 내가 바른쪽 치악산으로 들어 가더라고 말해 주시구려』 얼마 뒤 어마어마한 어가 행렬이 나타났다. 놀라 와들와들 떨면서도 운곡이 시킨 대로 한 할머니는 후환이 두려워 빨래터옆 깊은 소로 몸을 날려 목숨을 끊었다.

운곡을 각별히 흠모하는 치악산보존회장 우봉학(43)씨와 함께 운곡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치악산 동쪽 기슭,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에서 원주쪽으로 12㎞의 「곧은 재」를 넘었다.

횡성쪽에서 주천강을 왼쪽에 끼고 비포장길을 따라 「곧은 재」를 조금만 올라 가면 강가에 「노구소」(할미소)란 푯말이 있다. 바로 할머니가 빠져 죽은 곳이다. 며칠간 쏟아내린 장마비로 물살이 사납다. 할머니가 반대로 가리켜 준 곳인 횡지암이 10여m아래에 있고 태종이 잠시 머물렀던 태종대는 500m 위에 있다. 태종대 비각(강원도 문화재자료 16호)안에는 주필대라고 새겨진 비가 서 있다.

운곡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태종은 스승이 사는 산속을 향해 절을 한다. 이 때문에 이름이 붙여진 배향산, 한 고개를 넘고 또 다른 고개를 넘어 곤룡포를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스승을 생각했다는 원통재, 마지막으로 쉬고 갔다는 대왕재 등이 치악산의 명소로 남아 있다.


「…오고 가는 구름은 걸음 앞에 넘실대고

/ 일렁이는 산빛은 자리 위를 비쳐주네

/ 나에게 하는 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 차 달이고 시 쓰는 것이라네…」


「…잠을 깨면 시상이 절로 떠 오르고

/ 더 기쁜 건 찻잔 향기 새삼 그윽해라…」


「…죽솥이나 찻잔은 마치 중의 격식과 같고

/ 연기 바람 또한 세속 티끌과는 멀어…」


「차 끓이는 화로와 경서는 바로 절집 같구나」


누졸재에서 차와 더불어 살았던 그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시구들. 운곡은 태종을 피해 잠시 변암이란 굴속에 피신하긴 했지만 평생을 굴속에서 고사리만 먹고 살았다는 백이숙제는 아니었다. 거문고를 뜯고 시를 짓고 차와 술, 친구를 좋아했던 풍류객이었다. 차실(다헌)을 짓고 차벗을 초대해 차회를 열었다. 연못에 연꽃이 피어도, 좋은 차를 얻어도, 봄 꽃이 피어도, 가을 국화가 노랗게 피어도 친구를 불렀다. 차벗들과의 청교는 높은 격을 갖추었다. 고승대덕은 물론이고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목은 이색 등 많은 고려말의 유명한 차인들과의 교분이 두터웠다.

「곧은 재」를 넘어 원주쪽 치악산 들머리, 운곡이 은거했던 황골의 「돌경이 마을」(석경촌). 무학대사가 잡았다는 명당에 운곡은 잠들어 있다. 푸른 잔디 속에 할미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는, 벌의 허리같은 모양의 「봉요혈」에 자리잡은 무덤은 서북쪽을 보고 누워 있었다. 서북쪽이면 고려조 500년 도읍지 개성이 있는 방향이다. 죽어서도 고려에 대한 충절을 꺾을 수 없었던 운곡의 기개일까.

치악산 아래 변암 석벽에는 「돌샘을 뚫어 갈증을 풀고 산나물 캐어 가난을 위로하네」(개천석정상소갈 수십산소차위빈)라는 음각 글씨가 뚜렷하고 그가 물을 마셨다는 샘터도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운곡이 자주 들러 차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이웃 각림사는 절터 흔적만이 남았다. 무덤 곁에 세워졌던 석경사는 운곡재실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모운재로 현판이 바뀌어져 있었다. 모운재 오른쪽에는 교과서에 실린 운곡의 유명한 시조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를 담은 시비가 서 있다.<김대성 편집위원>


◎ 알기쉬운 차입문

/알맞은 찻물온도는 덖음차 70~80℃

/증제차는 더 낮아야

차를 우려내는 물의 온도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기온과 같다. 일정한 기온이 되지 않으면 꽃은 피지 않는다. 그렇다고 너무 기온이 올라 가면 화들짝 피어난 꽃이 쉽게 져 버린다. 차마다 제맛과 향을 오랫동안 살리는 물의 온도가 있다.

녹차는 물이 너무 뜨거우면 찻잎속의 카페인과 탄닌이 빨리 우러나와 맛이 쓰고 떫어 진다. 또 비타민C가 파괴되고 신선한 맛이 사라진다. 어린 순이나 잎으로 만든 차나 부스러기가 많은 차는 다 자란 찻잎보다는 물의 온도를 낮추어야 한다.

또 찻잎 색깔이 푸르면 푸를 수록 물의 온도를 낮추어야 한다. 솥에서 덖어서 만든 덖음차(부초다)보다는 쪄서 말린 찐차(증제다)가 푸른 빛이 더하며 찐차가 덖음차보다 찻잎이 쉽게 풀어지기 때문이다. 덖음차를 우려낼 때 70~80도가 알맞은 온도이니 찐차는 이보다 약간 낮으면 된다. 찐차 가운데는 50도 이하의 물에서 우러나는 종류도 있다.

우리나라 근대 차문화의 중흥조로 추앙받고 있는 초의 스님의 차법을 이은 응송 스님과 선암사 계열의 우리차는 뜨겁게 마셔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웃나라 차나 시중에서 흔히 팔리는 녹차를 뜨겁게 마시면 열이면 열 모두 소여물 삶은 물같은 맛이 되고 만다.

사원의 전통차는 오늘날 우리가 쉽게 대하는 녹차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졌음을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세월 따라 사람의 입맛이 바뀌었거나 아무런 검증없이 이웃나라 차맛 기준에 우리 입맛을 맞춘 결과일까? 「녹차는 식혀서 마셔야 한다」와 「우리 잎차는 뜨겁게 마셔야 한다」는 두 극단에서 한 걸음 비켜 서서 차 종류에 따라 물의 온도가 달라야 함은 변함없다는 점에 유의하자. 뜨겁게 마셔야 하는 차는 뜨겁게, 물을 식혀서 우려내야 하는 차는 식혀서! 그럴때 차생활은 한결 다채로운 모습을 띠게 된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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