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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3】원주 지광국사 현묘탑비(차따라:13)

【0013】원주 지광국사 현묘탑비(차따라:13)

한국일보 97.07.29 22면 (문화) 기획․연재


◎ 비문 구절구절 차승의 차향기

/고려의 큰 스님 기린 2.97m의 비석엔 ꡐ천ꡑꡐ제호ꡑ 등 차관련 문구가 5군데나…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터. 국보 59호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우리나라 차문화재로도 으뜸가는 보물이라 할 만하다. 통일신라 말에 세워진 쌍계사 진감선사비 등 차에 언급한 금석문이 없는 것은 아니나 하나의 비에서 5군데나 차에 관한 글이 보인다는 점에서 견줄 데가 없다.

불가의 화장법인 다비, 금석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차의 다른 이름 「천」, 차중에서 가장 맛과 향이 뛰어난 차를 뜻하는 「제호」 등이 눈길을 끈다.

한국차인연합회 사무국장 정인오씨, 연합회 회보인 「차인」 편집장 김영희씨와 함께 장맛비를 뚫고 지광국사비문의 차관련 기사를 확인하러 갔다.

서울서 영동고속국도를 따라 가다가 문막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나오면 부론면 법천리로 가는 지방도로가 나온다. 법천사터는 여주 신륵사와 가까운 남한강변에 있다. 지겨운 장맛비로 물이 잔뜩 불어나 물살이 거셌다. 원주라면 얼핏 강원도 산간지방을 떠 올리게 되나 이곳은 남한강의 세지류, 즉 장호원 충주 원주쪽의 세줄기 물이 모이는 경기도 접경의 넓은 평야지대이다.

야트막한 봉명산 남쪽 자락의 절터. 대가람의 옛모습을 눈앞에 그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마을 곳곳에 그 짐작의 실마리는 남아 있다. 법천리 들머리 논에는 큼직한 당간지주가 서 있고 사찰경내였다는 법천리 3개부락 집집마다 축대나 담장, 장독대로 절터에 널려 있던 반듯반듯한 화강암들이 쓰이고 있다. 마을사람들이 「장뜰」이라 부르는 곳은 절의 장독대터이고 「도시랑」은 절의 객사가 있던 곳이라니 능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한나라의 국사가 주석했고 1,000여명의 승려가 머물렀던 곳으로 아침 저녁 쌀 씻을 때면 냇물이 흐려졌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국보인 현묘탑비는 마을을 끼고 왼편으로 오르는 야트막한 산기슭에 서쪽을 향해 덩그러니 서 있다. 주인격인 국보 101호 현묘탑은 일제때 총독부로 옮겨져 지금은 경복궁 뒷뜰에 서 있다. 당시 이 비도 함께 옮기려다 조각기법이 신기에 가깝고 비가 워낙 커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전체 높이가 4.55m, 비석높이만 2.97m인 비는 중국명필 구양순의 구성궁법 글씨체로 2,050자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을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지광국사(980~1067)는 고려의 이름난 차승이었던 만큼 그의 비석에 혹시 차자와 뜻이 같은 「설」이나 「가」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2,000자가 넘는 비문을 하나 하나 확인해 나갔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어 가며 비문을 읽어 나가던 정인오씨가 흥분한 듯 소리를 내질렀다. 『여길 좀 봐. 이거 차 「천」자 아냐? 「제호」도 여기 있네』

고려때만 해도 국가의 대소 공식행사에는 반드시 차가 사용됐다. 진차의식으로 다과를 베풀고 또 신하들에게 차를 예물로 하사했다. 신하가 죽었을 때, 사신을 접대할 때, 왕자가 탄생하거나 세자에 책봉될 때, 공주가 시집갈 때, 군신회의때 등 11가지 예식에 차는 뺄 수 없는 예물이었다. 특히 신하의 장례때 차가 하사된 예는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지광국사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10여차례나 차가 하사된 예가 있다.

문제는 비문 가운데 지금까지 다른 비문에서 볼 수 없었던 「천」자가 나온다는 점. 왕사로 추대하면서 임금이 금실로 만든 법복과 함께 향과 차를 보냈다는 내용이다. 「천」자를 옥편에서 찾아 보니「차나무의 잎을 늦게 따서 만든 차로 명(차의 다른 글자)과 같다」(만취위명혹천)고 돼 있다.

비문의 마지막 귀절인 지광국사 송덕시에는 이런 귀절도 있다.


「… 이 생명은 멀지않아 끝날 것일세

/ 아름다운 제호도 맛을 잃었고

/ 향기롭던 담파향도 향기가 없네!…」


제호는 소나 낙타의 젖과 함께 만든 차로 차중에서 가장 맛과 향이 뛰어난 차를 말한다. 고전에서나 읽던 제호라는 글자가 이 비에 있는 것 또한 예사롭지 않다며 정씨는 흥분했다.

지광국사가 87세로 이곳 법천사에서 입적할 때의 정경을 비문은 이렇게 적었다. 「이해(1067년) 10월23일 편안히 오른쪽으로 누워 잠이 드셨다. 이날밤 이슬비가 내렸다. 국사께서 잠을 깨어 가부좌를 하고 앉아 제자들에게 바깥 날씨가 어떠냐고 물었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다는 대답을 듣고는 곧 입적했다. 옛적 사리불이 입적할 때 무색계 천신의 눈물이 마치 봄에 내리는 이슬비와 같았으니 오늘밤에 내린 비인들 어찌 제석천의 눈물이 아니겠는가. 임금은 크게 슬퍼하시고 빈소에 조문토록 하되 정중한 장례를 치르도록 하는 한편 지광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차와 향을 내리셨다. 그리고 11월 9일 법천사의 봉명산 동쪽 좋은 곳을 골라 다비하니 사람과 귀신이 슬퍼하고 하늘은 어두워졌다. 뭍짐승과 날짐승까지 슬피 울었다」 현존하는 비문 가운데 한군데서 5번씩 차에 대해 들먹인 예는 없다. 이 비가 차문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래서 더욱 크다.<김대성 편집위원>


◎ 알기쉬운 차입문

/더운 여름철 차가운 냉녹차도 좋지만 뜨거운 차로

이열치열때 진정한 맛 느낄 수 있어

겨울에는 차를 마시되 여름에 차를 마시지 않으면 진정한 차인이 아니라고들 한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차생각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차가 본래 갈증을 푸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니 여름철에도 최상의 음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부채보다는 선풍기, 선풍기보다는 에어컨에 날로 익숙해진 이들에게 여름에 뜨거운 차를 마신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냉차. 냉차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흔히 「아이스티」로 불리는 냉홍차이다. 진홍색 홍차와 투명한 얼음, 유리잔이 어울리고 레몬 한 조각까지 곁들여 진 냉홍차는 시원하게 마시는 즐거움에 눈으로 보는 즐거움을 더해 준다.

녹차를 마셔 온 우리나라에서 차를 차갑게 해 마시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70년대 후반 국내에서 차를 우려내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마시는 법이 알려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찬물로 그냥 차를 우려내 마시는 법까지 유행하고 있다. 4, 5년전부터는 차게 해 마실 수 있도록 캔과 페트병에 녹차를 담은 상품도 나왔다.

가정에서 냉홍차나 냉녹차를 만들 때는 우려내는 시간이나 차의 양을 늘리고 그냥 벌컥벌컥 마시기 보다는 입안에 잠시 머금어 은은한 맛을 즐기면서 천천히 넘기는 게 좋다. 입안에서 되살아 나는 차향기는 즐길 만하다. 그러나 아직 많은 차인들의 기본정서는 차는 그 성품이 차기 때문에 따뜻하게, 특히 여름에는 이열치열로 더욱 뜨겁게 마시는 데 익숙하다. 여름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 뜨거운 차를 마셔 본 사람은 한바탕 한증을 하고 난 뒤처럼 날아 갈듯한 상쾌함을 맛보았을 것이다.

『차는 차게 마시면 안된다』와 『차도 차게 마실 수 있다』는 끊임없는 논란 속에서 일본은 가루차를 아이스크림에 넣은 가루차 아이스크림으로 세계시장을 공략하고 있고 찬물에 우려 마시는 냉녹차를 개발했다. 96년 동남아 시장에서는 차게 마시는 오룡차와 녹차가 기존의 커피와 콜라, 그리고 기능성 음료를 누르고 시장을 석권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차의 효능과 건강을 함께 고려한 과학적인 검증을 통해 우리 나름의 여름차 마시는 법을 다듬어 가야 한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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