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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5】양주 회암사지 야외다석(차따라:15)

【0015】양주 회암사지 야외다석(차따라:15)

한국일보 97.08.12 22면 (문화) 기획․연재


◎ 의구한 석대좌에 차향 흐르는 듯…

/27만평 262칸 큰 절있던 자리 석축․주춧돌 등 옛 영화 자취

/여말선초 차문화 꽃피던 곳… 차끓이던 돌대좌 2기 남아

경기 양주군 천보산 기슭 회암사터는 90년대 들어서면서 새로운 차문화유적지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준후 머무른 것으로도 알려졌지만 고려말 조선초 차문화를 꽃피운 곳임이 뒤늦게 밝혀져 각광을 받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27만평의 대지에 건평 9만평, 262칸의 크고 작은 건물이 즐비했던 예전의 웅장한 모습은 찾을 길 없지만 남아있는 석축과 당간지주, 주춧돌 등을 보면 대단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손님을 맞아 차를 올렸던 향적전, 마당에서 차를 끓였던 돌차탁, 찻물을 떠올리던 우물터와 목욕시설 등 품격 높은 차례가 행해진 곳이라는 것이 지표조사와 부분발굴로 밝혀졌다.

여기다 인도 108대 조사인 지공선사(?~1363), 나옹화상(1320~1376), 무학대사(1327~1405), 함허득통(1376~1433), 보우스님(1515~1565)같은 거물급 차인들이 머물다 간 곳이었다.

특히 이곳에서 발굴된 돌대좌(석대좌)는 전혀 새로운 야외용차구로 귀중한 차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가로 135㎝, 세로 125㎝, 높이 50㎝인 이 석조물은 차를 끓이는 차관받침대로 추정되지만 여럿이 둘러 앉아 편안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야외차탁으로도 훌륭하다.

지난 90년 국립박물관의 부분발굴 이후 지표조사에 참여한 명지대 건축학과 김홍식(문화재전문위원)교수는 91년에 발표한 「양주 회암사지의 전각배치에 대한 연구논문」에서 「이 절터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손님을 접대하는 향적전을 지어 차례를 올렸던 공간을 마련한 것과 향적전 마당에 차를 끓였던 돌대좌(석대좌)2기가 남아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김교수는 특히 향적전 안에서 발견된 욕실은 목욕문화를 찾아 볼 수 없는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자료라며 구체적인 객실의 존재, 차를 마셨던 흔적, 손님 대기장소라고 여겨지는 여러 시설물들을 살펴볼 때 『회암사의 차례 공간은 14세기 우리나라 차문화의 중요한 증거물』이라고 결론지었다.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바로 나옹스님의 제자이었으므로 그대로 태조의 원찰이 되어 더욱 번창한다. 무학대사는 이곳에서 1㎞ 북쪽 천보산 아래턱에 부도를 지키는 부도전 역할을 하는 암자규모의 회암사를 짓고 조사인 지공화상과 스승인 나옹스님의 부도, 자신의 탑을 미리 세워둔다. 무학대사 부도는 보물 388호로, 부도앞 쌍사자석 등은 보물 389호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천보산 중턱 나옹스님의 비(보물 387호)는 지난 3월20일 산불이 나면서 파괴돼 버렸다. 성종 3년(1472)에는 정희왕후의 명으로 3창을 한다. 명종 4년(1548)에는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불교재건을 시도한 보우스님이 주석했다. 문정왕후가 죽고나자 유림의 압력으로 승직을 빼앗긴 보우스님이 제주로 귀양가 살해된 후 회암사는 형편없이 퇴락하기 시작한다.

목은 이색이 쓴 「양주 회암사 수조기」에는 「절의 크기가 모두 262칸, 모셔진 불상만도 15척짜리 7구가 있었고 관음상도 10척이나 되었다」 「보광전을 중심으로 동서 좌우로 나누어 여러 전각이 우뚝 솟아나고 여러 요사가 얽히고 설키며 종루와 사문 부엌과 창고 및 객실이 질서정연하고, 집과 지붕들이 연달아 펼쳐지고, 회랑과 월랑들이 덩쿨처럼 두르고, 높고 낮은 것이 아득하여 동서를 알지 못한다」 「굉장하고 미려해서 동국에서 첫째다. 강호를 유람한 자들이 모두 일컫기를 비록 중국에서도 많이 보지는 못하였다고 하는데 과장하는 말이 아니다」고 했다.

의정부에서 3번 국도로 동두천으로 가다 덕정사거리에서 우회전한다. 포천쪽 316번 지방도로로 5㎞ 가량 가면 압정휴게소 길건너가 회암사 입구. 입구에서 비포장길 500m를 가면 툭터인 회암사터가 나온다.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낮은 석축이 짜임새있는 규모로 쌓아져 있다.

층계는 궁궐의 계단처럼 태극문양이 선명한 막음돌을 한 대우석으로 장식되었다. 전면 서쪽에 당간지주가, 동쪽에는 통돌 가운데를 파서 만든 특이한 양식의 당간지주가 또 있다. 높이 선 용머리모양 당간 위에 휘날리던 불기의 당당한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숲속에 싸여있는 보광전터에서 축대를 내려서면 돌대좌가 있는 향적전터가 나온다. 돌대좌에서 3m남쪽에 깨지고 금이 간 석조가 잡초에 덮혀 있다.

주위의 잡초를 베어내고 돌대좌에 키낮은 걸상을 놓아보았다. 차그릇들을 놓고 찻자리 연출을 해 보았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반듯한 돌대좌는 한 면에 두사람은 너끈히 앉을 수 있는 크기였다.

차탁 표면을 약 2㎝가량 파내고 북쪽면 복판 가장자리에 큼직하게 구멍을 뚫어놔 차탁에서 흐르는 물이 이 구멍을 통해 바닥으로 흐르게 했다. 고려때는 벽돌이나 두꺼운 책모양으로 압착한 차가 대종이었다. 발효를 시켜 단단하게 굳은 차를 망치로 부수거나 멧돌에 갈아 가루로 만들었다.

이것을 물에 끓이거나 뜨거운 물에 우려내 마셨다. 차를 우려내면서 뜨거운 물로 차그릇들을 흠뻑 젖게 하는 등 바닥에 물이 늘 흘러 넘치기 때문에 벽돌차나 전차를 내는 차탁자로는 안성맞춤으로 보였다.<김대성 편집위원>


◎ 알기쉬운 차입문

/8월의 일본 다실 인생무상 의미하는 무궁화로 장식

/같은 사물 다른 정서 양국간 차이 느껴

일본 차문화는 가루차를 마시는 쟈노유와 잎차를 마시는 센자로 나뉜다.

쟈노유는 우리가 차도라고 부르는 일본 정신문화의 큰 기둥이고, 센자는 일본의 생활 차문화이다. 여기서 센자는 다시 고급차인 교구로와 저급차인 반쟈(번다)를 마시는 방법으로 구분되는데, 우리와 비교적 친숙한 현미차는 현미를 볶아서 반쟈와 섞어 만든 것이다.

이 현미차를 마시다 보면 우리의 숭늉이나 미싯가루를 응용해서 만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일본에서 이와같이 찻물에 밥을 말아 먹는 오차노보시가 있다. 일본의 현미차와 오차노보시를 보면 우리문화와 일본문화가 너무 닮았지만 또한 너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자리에 무궁화가 있다.

8월이면 일본의 차실에는 우리의 국화인 무궁화 꽃이 장식된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무궁화가 덧없이 살다가는 아침 이슬과도 같은 우리의 삶을 닮았기 때문에 차실의 꽃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우리가 한여름 내내 피는 무궁화에서 무궁한 강인함을 보았다면, 그들은 무상한 덧없음을 본 것이다. 우리 가정에서 무궁화 꽃을 꽂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 무궁화를 보고 무궁한 강인함을 느끼는 사람은 또 과연 몇이나 될까.

그 무궁화를 한 자연인의 가슴으로 껴안아 차실의 꽃으로 만든 일본인과 나라꽃이니까 조건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우리는 분명 다른 역사적 환경을 가지고 있다. 한 식물을 두고 사랑함에도 두 나라 사이에 접근 방법이 다른 것이다.

마치 우리의 막사발이 저들의 나라에 가서 귀물 취급을 받듯이 우리 것 속에 담긴 소박함과 밝은 생명성을 저들은 그들의 차도라는 미학속에 옮겨 놓아 저들의 것으로 만들어 김치가 「기무치」가 되듯 일본의 것이 된다.

문득 누룽지를 끓이다 찻잎을 넣어 보았다. 차맛과 어울린 숭늉, 한마디로 숭늉차다. 담백하고 깔끔한 맛, 그리고 푸른 차빛이 일품이다. 기무치가 다시 김치가 된다. 차생활은 이렇듯 작은 것의 변화에서 비롯한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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