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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강릉 선교장 활래정/선말 사대부 다풍 유일 간직(차따라:20) |
【0020】강릉 선교장 활래정/선말 사대부 다풍 유일 간직(차따라:20) 한국일보 97.09.23 24면 (문화) 기획․연재
◎ 효령대군 13대손 이후가 건축 /8대째 내려온 다구 97점 보존 /부속다실서 준비한 차를 손님과 주인앞에 바치는 행다법도 중․일과 대조 강원도 강릉 선교장(중요민속자료 5호)의 다실 활래정은 조선말 사대부의 다풍을 현시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단 하나의 유적이다. 특히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 내는 「부속 다실」을 둔 건축양식과 8대를 전해 내려 온 손때 묻은 야외용 차통 등 귀중한 다구 97점이 돋보인다. 효령대군의 11세손 무경 이내번(1703~1781)의 손자 오은 이후(1773~1832)가 이곳에 선교장을 짓고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갈 터를 잡은 것이 순조 16년(1816년). 당시는 바로 다산 정약용(1762~1836), 추사 김정희(1786~1856), 초의(1786~1866) 스님 등 근세의 대표적 차인들이 한 잔의 차로 청교를 나누던 우리 차문화의 전성기였다. 오은도 글과 차를 매개로 추사와 친교를 쌓았다.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대관령을 넘어 강릉에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추사는 선교장에 들러 「홍엽산거」라는 편액과 병풍, 차시를 남겼다. 추사 뿐만이 아니었다. 순조때 영의정을 지낸 운석 조인영 등 당대의 거물들이 잇따라 선교장에 들렀다. 또 해를 거듭하면서 성당 김돈희, 해강 김규진, 농천 이병희, 대원군 이하응, 몽양 여운형 등이 이곳에 시화를 남기고 갔다. 오은은 선교장 앞뜰 400평에 연못을 파고 서울 창덕궁 비원의 부용정과 흡사한 활래정을 지었다. 땅위의 온돌방은 장지문을 닫으면 두개로 나뉘어 지고 연못물 위로 뻗은 마루는 돌기둥으로 받쳐 놓았다. 멀리서 보면 작은 누각의 반쯤은 물위에 떠있는 듯하다. 온돌방과 연못속에 살짝 발을 담근 듯한 누마루가 「ㄱ」자형이다. 활래정이 특별한 것은 부속 다실을 두었다는 점이다. 온돌방과 누마루를 연결하는 복도옆에 한평 남짓한 방을 만들어 차를 끓이고 우려내도록 했다. 이런 다실 형식은 당시 사대부의 독특한 차풍속을 짐작케 한다. 요즘 한․중․일 3국간에는 행다법을 둘러싼 논쟁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그 중의 하나가 주인이 손님앞에 찻상을 내 놓고 차를 우려내는 전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과연 전통 행다법이냐 하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나라 사대부의 정통 행다법이 어떤 것이었느냐는 활래정의 부속 다실에서 어느 정도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찻상은 물론 찻물을 끓이는 화로나 퇴수 그릇, 수건 등 모든 차구를 펼쳐 놓고 차를 대접하는 요즘의 행다법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활래정에서는 「부속 다실」에서 준비한 차를 심부름하는 아이가 들고 와 손님과 주인앞에 공손히 바쳤다. 지금 중국과 일본의 행다법과는 사뭇 큰 차이가 느껴진다. 73년까지 이화여대, 단국대 등에서 복식과 예절을 가르친 선교장의 8대 종부 성기희(77)씨는 50여년간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를 모시면서 활래정에서 열린 차회를 수없이 보았다. 그러나 손님 앞에서 주인이 직접 차를 우려 내는 모습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시어른이 간혹 이웃 해운정이나 경포호수의 별장, 방해정에서 차회를 열 때에도 시동이 화로 등 다구를 매고 따라가 정자 아래에서 차를 끓여 올렸다. 시동이 차를 우려 작은 찻상에 찻잔을 담아 들고 갔는데 찻잔에는 뚜껑이 있었고 찻상에도 붉은색 보자기를 덮었다고 한다. 그리고 찻자리 한켠에는 언제나 향로를 두어 향을 피웠다. 물론 선교장의 행다법이 결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글에는 주인과 손님이 마주 앉아 차를 끓이며 함께 다선 삼매에 드는 정경을 그린 것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속세를 떠난 승려나 초야에 묻힌 선비들의 격식을 떠난 행다법과 예법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던 사대부 집안의 행다법이 같았을 리가 없다. 선교장의 자랑은 활래정의 부속 다실만이 아니다. 전해 내려 오는 다구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것들이다. 들놀이나 뱃놀이때 썼던 휴대용 은제 다기세트는 화로(다정), 다관, 물통, 찻잔, 화로통 등이 고루 갖추어져 있는데 가볍고 작아 들고 다니기에 편하다. 분청사기 찻주전자, 청자 다관, 청자다완, 백자 찻종, 차탁과 차반, 다정 등에도 역대 선교장 주인들의 손때가 묻어 있다. 이 다구들은 한때 선교장 전시관에 진열되기도 했지만 한차례 도둑이 든 이래 깊이 감춰졌다. 선교장의 행다법을 이어 받은 성씨는 최근 붐을 이루고 있는 찻자리를 보면 걱정을 지울 수 없다고 밝힌다. 한국이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한복 차림과 여인네들의 정갈한 몸놀림이 전통을 앞세우는 찻자리에서조차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 전통적인 사대부집의 찻자리에서는 행다법 못지 않게 옷매무새와 행동거지도 중요했다. 여인네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아무리 요즘의 패션이 제멋대로라고 하지만 찻자리에서만은 전통을 이어야 합니다. 자줏빛 저고리 고름은 옛 여인들이 남편이 있음을 말없이 알리는 것이었지요. 그러니 미혼녀나 남편이 없는 여자가 자줏빛 옷고름을 다는 건 넌센스입니다. 요즘 눈물고름이라고 해서 옷고름 밑에 또 하나의 고름을 늘어 뜨리는 것도 정상적인 옷차림이 아니에요. 치마를 잘못 입다 보면 치마를 동여 매는 끝고름이 삐져나와 예의에 어긋난 옷차림이 되는 것을 흉내낸 것입니다. 특히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절을 하는 것은 사대부 집안에서는 당치도 않은 예절이지요』<김대성 편집위원>
◎ 알기쉬운 차입문 /차에도 오미 맵고 시고 떫고 쓰고 달고… /그러나 최고는 시원하고 개운한 맛 우리 민족의 맛에 대한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사람의 성격까지를 맛으로 구분할 정도이다. 일을 처리하는 데 어딘가 부족한 사람을 「싱겁다」고 하고, 하나 하나 꼼꼼하고 집요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맵다」고 한다. 빈틈 없이 손해라고는 전혀 보지 않으려는 사람을 「짜다」고 하고, 야단을 칠 때도 「매운 맛을 보인다」고 하는 등 이런 맛 저런 맛으로 세상을 보고, 또 살아 간다. 그래서 차를 마실 때도 다섯가지 맛, 즉 오미를 따진다. 맵고 시고 떫고 쓰고 단맛을 고루 갖춘 차를 일품으로 친다. 자연의 기운인 오행을 두루 갖추었으니 완전무결하다는 뜻이다. 차의 쓴맛은 카페인, 떫은맛은 탄닌, 단맛은 아미노산에서 비롯한다. 차에서 매운맛과 신맛을 느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포도주나 향수의 품질을 가리는 전문가들이 있듯 차의 등급을 정하는 품차사가 있다. 그들은 차한잔을 맛보고 차를 만든 시기와 날씨까지 알아 낸다고 한다. 차의 고수들은 이 오미를 신통하게 가리면서 차맛을 통해 삶의 맛을 배운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고졸하면서도 여운이 긴 차맛과 차생활을 「시부이」라는 말로 나타낸다. 차맛과 삶의 맛을 한데 묶어 표현한 말이다. 이 말이 「쌉쌀하다」의 「쌉」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듯 우리의 차맛과 삶의 맛도 아주 가까이 있었다. 차생활을 하면서 가장 먼저 익힐 수 있는 삶의 철리는 쓴 맛이 다하면 단 맛이 돈다는 고진감래다. 진하게 우려 낸 차를 마시고 난 뒤 조금 사이를 두고 엷게 우려낸 차를 마시면 신기하게도 입안에 단 맛이 돈다. 차맛을 잘 느끼지 못하는 초보자들도 한번쯤 시도해 볼 만하다. 차맛을 쉽게 익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차를 마시면서 추구하는 최고의 맛은 역시 시원하고 개운한 맛일 것이다. 당나라 시인 노동이 「차 일곱 잔을 마신 뒤 하늘을 난다」고 썼을 정도로 차를 마시면 비개인 하늘처럼 마음이 맑아지고 상쾌한 기분이 든다. 이렇듯 시원하고 개운한 삶, 그속에 차의 참맛과 차생활의 참다움이 담겨 있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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