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한국과 일본의 다도

[출처 : http://www.aichado.com/ 비봉 김진홍]

茶道란 무엇인가?
이것은 매우 어려운 난제이며, 앞으로 이 사이트의 각종 칼럼을 통해 조금씩 
접해 나가게 되겠지요.
그러나 한국의 다도와 일본의 다도를 굳이 비교한다면, 무형식과 형식으로 나눌수도 있겠지요. 

즉, 우리의 다인들이 그저 차란 즐기면 되는 것이여.일본처럼 딱딱하게 격식차리는 것만이 
다도는 아닌것이 물론 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다도는 과연 격식만 차리는 것을 강조합니까?
그것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우리와 같이 차란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격식이라는 것이 따르게 될까요. 
우리가 그것은 스포츠를예를 들어, 골프나 탁구 그어느 종목이던간에 깊이있게 그 실력을 키우기 위해 흔히들 얘기하는 기본기라는 것이 있지요.
기본기를 충실히 해놓을때에야 응용이 생기고 어떠한 자세에서도 그것을 능히 소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도에서 어느정도의예절교육이나 격식을 따지는 것은 격식에 목적이 있는것이 아니라, 이 차를 대접하는 주인이나 팽주 또는 정주가 겉으로도 격식있고 무엇인지 예의를 차린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아니한 것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보이는 것이지요. 
무엇이든 알고나면 간단한것을 설명이나 훈련으로 가르키는 것은 어느정도 격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만, 한국과 일본의 현재를 따져보면, 그것의 연원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갔을때 한국과 일본의 다도가 동일하였다면, 그 이후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귀족, 무사문화가 정신이된일본의 에도시대는 말차를 중심으로 격식화된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말차도가..

사대부, 문사문화가 바탕이된 한국의 조선시대는 전차를 중심으로 풍류를 즐기에 된 굳이 이름한다면 전차도가 각기 특성을 가지고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현대는 어떠합니까? 일본도 전차도와 말차도가 있지만 여전히 말차중심의 다도를 뜻하고 있고 점차 전차가 인기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에서도 전차에서 말차를 즐기는 인구가 점차 넓혀가고 있고요. 

어느 나라건 그 문화생활과 생활의 여유가 있게 되면 차라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음료이자 기호품이며, 고도의 정신세계로 흠뻑 빠져들게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지요.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찾는 다는 것, 추구한다는 것이 바로 다도가 아닌가 봅니다

 

풍류

한국과 일본의 다도의 차이에 대하여 많은 분들이 많은 설을 내어 놓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분석들은 나름대로의 논리상 정연성과 근거를 가지고 우리들을 설득하고 있다.
필자는 그러한 여러분들의 복잡한 비교연구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동안 느꼈던 한일간의 다도의근본적인 차이의 하나에 대하여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먼저 우리의 다도가 지금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화두의 하나인 다예(다례)인가 아닌가와 또 형식이 필요치 않다 아니다 라는 것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풍류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그 근원에 대해 접근해 보고자 하였다.
풍류도니 풍류니 하는 것들은 우리들 한국인의 실생활속에도 많이 젖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은 풍류를 아는 사람이다라고 표현한다던지, 옛 선비들의 풍류가 어떻고 하는 식의 말들이 모두 그러하다. 옛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시대화랑들의 신선도 내지는 그들의 풍류가 또한 그러하였으며, 고려시대 양이정의 지붕을 청자기와로 덮은채 유유자적하던 고려의 귀족들의 풍류는 또한 그 나름대로의 고급스런 풍류였음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어떠하였는가? 조선시대 또한 많은 시인묵객들은 술과 차와 더불어 풍류를 논하였으며, 단원 김홍도의 형식과 당시의 이른바 체통을 벗어난 제반 형식의 특이한 화풍 또한 그 나름대로의 풍류의 한 산물이었다고도 볼수있지 않을까 싶다.
이상과 같이 우리들의 선조는 풍류와 더불어 유유자적한 그네들의 삶을살아 왔으며 이러한 풍류속의 하나의 유희 내지는 하나의 더불어 사귐의 한 방편으로 차와 술은 없어서는 안될 하나의 필수적인 기호였으며 음료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가 찾아오거나 야외로 놀이를 나가거나 필수적으로 술과 차는 동반하였음에도 그것은 풍류의 목적이 아닌 수단이요 방편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술과 차는 그들이 읊은 시문학의 세계에서 잘 나타나듯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자연속에서 느껴지는대로의 차를 즐겼고, 그것이 굳이 표현한다면 한국의 다도였던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반면, 일본의다도는 어떠하였는가? 우리나라와 당시대로부터 이어지던 일본의 형식화된 다도형성기 이전까지는 거의 같은 괘도를 그렸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른바 일본의 다성이라 일컬어지는 센노리큐(千利休)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 우리의 오랜 중앙집권(한반도의 통일)기간인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는 시기 굳이 비교하자면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거의 500여년간 - 조총과 일본도가 난무하는 군웅할거시대 다시말해 전국시대라는 전란기속에서 차를 접하였으며, 그리고 에도시대라는 도쿠가와 바쿠후(幕府)시대 250여년간은 어느정도 안정기에 들어가긴 하였으나, 봉건체제라는 특수성상 크고 작은 영주들간의 분쟁은 계속이어졌기 때문에 무사들의 계급문화는 우리와 큰 분기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하에서 우리나라의 문사들이 들이며 산이며 자연이 있는곳이면 발걸음 닿는데로 움직여 편안하게 술자리를 열거나 야다회를 열어 술을 마시고, 차를 끽하며 풍류를 즐기며 시를 읊음에 있어 자연스러움을 만끽하였지만, 일본의 무사들은 엄격하게 통제되고 선별된 인원(다회참가자가 믿을 수 있는 손님들만 초청하는 초청장의 발부)으로특별히 만들어진 차를 목적으로한 장소(무기를 휴대하지 못하고 장검을 가지고는 출입할 수 없도록 좁은 문을 설치한 다실의 고안 등)에서만이 그나마 마음놓고 차를 즐기며 풍류를 논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다도는 당초부터 차가 목적이었고 다회를 통한 풍류를 논한다는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풍류속의 차와는 같다고 볼 수 있는 면이 있으면서도 아주 다른 발전과정을 거치게 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러한 풍류속의 차를 즐기는것과 차를 목적으로 모여 풍류를 즐기는 양국의 다도문화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차만을 목적으로 모이게 되는 일본의 다도가 한국의 다도에 비하여 형식화되고, 차속에서 풍류를 논하기 위한 각 종 다도구의 고안과 많은 다서, 그리고 많은 다시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한일간의 다도를 비교하면서 이러한 배경을 모르고서는 엉뚱한데서 답변을 이끌어내면서 괜시레 우리조상들을 욕보이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일본인들은 많은 기록을 남기는데 우리조상들은 다서 한권이나 다시라도 제대로 정리된 저작물이 없다는 등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역사연구나유학연구서 등 모든 저작물을 동시에 놓고 비교할 경우 우리의 인쇄 출판문화가 일본에 뒤진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할 수 있다. 
이제 현대에 들어와 우리 주변에 다도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잡지들이 간행되고 또 다우들의 모음도 애초부터 차를 목적으로모이고 연락하며 차를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 자 이제 주변을 돌아보자. 그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차를 목적으로 모이는 자들은 차에 관심이 있고 또 차에 관한 관심도가 높아지자 많은 다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모든 현상은 다름아닌 필자가 나름대로 느낀 차가 풍류의 주체인가 아닌가에 대한 반증이라 보고싶다.
일본다도에서 많은 도자기 명품에 대한 감상문들이 에도시대 활동했던 많은 다인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바로 이와같이 차를 목적으로 모인 다회에서 차만이 주제가 됨에 따라 그다회의 시간동안 모든 대화의 주제는 차를 둘러싼 다기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가운데 차의 유희는 많은 다시와 예법 등 형식화된 하나의 사회예법(엄밀히 말해 무사귀족계급들의 다도문화)으로 계승 발전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일간의 다도비교는 바로 이러한 밑바탕위에 양자를 조명해 볼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것이라 볼수 있다. 필자는 그러한 관점에서 현재 우리들의 화두인 예법이 필요한가 아닌가에 시선을 돌려볼 경우 모두 맞는 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커피한잔을 마시더라도 경망스럽다거나 예의가 아니라는 식, 경양식집에 가더라도 포크가 어떻고 식칼은 어느손으로 하듯이 차도 하나의 음료이며 역사적 전통을 지닌 기호품이기에 모여 차를 마시는 사람들간에 당연 예법은 있어야 될 것이며, 또 친근한 친구들이나 나자신이 즐기는 나만의 우리들만의 풍류속에서 차를 마실 때, 굳이 다완이라는 이름의 고급도자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어느 분의 말씀처럼 보온병에 가득 차를 담아 산 정상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쏘이면서 자신만의 풍류를 즐기며 보온병 뚜껑에 차를 마시는 그 멋은 가히 현대 풍류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그러한 음다는 형식도 장소도 그리고 예법도 필요없는 자유인의 차가 아닐런가 싶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 다도의 진수가 아닐까 싶다.

다실(茶室)

한국과 일본의 다도의 차이라거나, 근본적인 다도형성을 비교연구함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것중 하나는 바로 다실(茶室)이라 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의 다도에 다실이라는 존재가 있는가 다시말해 차만을 마시기위한 공간으로서 다실을 의미한다면 그 존재유무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필자는 없다고 단언한다. 한편, 이러한 차만을 마시기위한 특별한 공간으로서의 다실은 실상은 중국도 없고, 일본만 16세기이후에 등장한 형식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이 양국간의 다도문화에서 그러면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수차례에 걸쳐 그동안 발표한 글들중에서 언급한바 있듯이 가장 큰 차이라면 역시 문사와 무사라는 양자관계속에서 풀어나가야지만 이 다도문화상에 각종 형식의 형성과정이 이해될수있으리라 본다.
한국의 다도에서 다시말해 한국의 차문화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민들의 자유로운 어쩌면 모든 형식을 초탈한 고도의 말그대로 다도(茶道)에 이른것이라고도 할 수 있듯이 너무나 형식화되거나 일정한 룰을 피부적으로 거부하는 현상을느끼게 된다. 그것은 수백년을 내려온 살아있는 우리들의 생활속의 다도정신이나 다도철학에 녹아져 있기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여하튼간에, 그러면 한국의 차문화는 과연 어떠하였는가? 고려시대의 귀중한 기록중 하나로 잘 인용되고 있는 송나라의 사신이었던 서긍이저술한 [선화봉사 고려도경]속에 나타난 기록들을 보면 당연히 엄격한 다례가 지켜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엄격한 다도예절의 존재유무와 차만을 위한 공간인 차실의 유무가 반드시 일치한다거나, 차실이 있으면 다도가 정립되었고, 없으면 다도가 없었다는것이 아닌 것이다.
한국의 차문화속에 있는 근본적인 정신은 아니 근본적인 차생활 주변의 환경은 평화로운 안정속의 시인묵객이라는 문사의 다도였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이 대대로 술을 즐겨이 한 것은 전쟁기가 아닌 평화기였음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술에 취해 이태백을 논하며, 차를 나누어 마시며 다시(茶詩)를 짓는 것은 시인묵객의 풍류속에 자연스레 녹아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한국의 다인들은 때와 장소는 차를 마시는데 아무런장애가 되지 못하였다. 앉아 차를 마시면 바로 그것이 다실이었던 것이다. 사랑방이건, 야외의원두막이건, 등청한 관청한귀퉁이의 자리이건간에 차생활속의 장소는 아무런 필요,충분조건속에 포함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다만, 객을 접대함에 있어서 예의에 어긋나는 장소만 아니라면 그속에 다도생활은 존재하였던 것이다.
한편, 일본의 다도는 무사들의 전국시대에 상호간의 냉혹한 먹고먹히는 관계속에서 차라는 매개를 통해 당초부터 정치적인 맥락속에서 도입되고 발전된것이었다. 흔히 투차의 병폐를 낳은 수많은 금품들을 상품으로 걸게된 무로마치시대의 유행들도 실상은 그들의 능력과 권세 등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위한 것도 한 이유가 있었다. 이후 일본의 다성이라 추앙받고 있는 센노리큐(千利休)가 완성하였다는 다실은 그 원형이 한국의 민간건축물이니 아니니 말도 많지만, 그에 대한 해석상에 조금은 다른부분도 많이 있다.
어느 사람은 현대에 이르러 예전의 다실을 해석함에있어서 누구나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다실에 들어가는 입구에서는 허리를 굽히고 쪼그린채 들어가게 되어있어서 일본의 다도의 위대성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애초에는 그렇지 아니하였음을 기억하여야한다. 일본의 전국시대에 다실의 필요성은 당초부터 중요한 과제였다. 무사들의 이합집산은 차를 마시러 모일때도 끊임없는 긴장태세속에서 차를 마셔야만 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긴 장검을 혹시 몸에 숨기고 있더라도 차실에 들어갈때에 궁리하여 만든 그 입구로는 도저히 장검은 걸릴 수밖에 없도록설계된궁여지책속의 방책이라볼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일본 다도속의 살벌한 환경하에서 낳은 또하나의 풍습은 바로 눈앞에서 차를 만들어 손님들에게 안심시키는 방식의 채용이다. 모두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모여든 각 영주들과 다인들은 독살외에는 다실속의 살인은불가능하게 된것이므로, 보이지 않는곳에서 차를 만들어낼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의 다도가 마당한편에서 풍로를 이용하여 차를 다려 잔에 담아 손님에게 접대하던것과 달리, 바로 보이는 그리고 보여주는 다도형식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센노리큐가 임진왜란 1년전에 할복을 토요토미히데요시로부터 명받게 된 것은 여러 제설들이 분분하지만, 그중의 하나로서 눈에 가시같은 토쿠가와이에야스를 초빙하여 차로 독살시키라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하는 점도 눈여겨 볼만한다.
한 나라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실상은 그 문화의 형성과정속에 녹아있는 역사적 배경등도 참고하여야만한다. 그것을 단순하게 현대인의 삶속에서 그냥 직시할경우에는 눈에 보이는것만을 가지고 이해하게 되며, 그것은 이해가 아닌 오해가 되는 것이다. 간혹 모르는 이들이 한국에는 다실이 없는데 일본에는 다실이 있으므로 다도의 형성은 일본인이 만들어낸것이구나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전혀 아닌 것이다. 17세기말엽경에 이르러 드디어 일본에서 차만을 마시고, 차를 매개로하여 다인으로서 다도모임을 주관하게 하는이른바 전문적인 차가문을 형성하고 그들의 세습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이러한 다실은 전국적으로 그 가계들을 중심으로 발전 그들나름대로 형식화되어갔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특성은 어디까지나 전쟁속에서 한시름놓을 수 있는 가장안전한 차를 마시는 장소로서 탄생한 것이 다름아닌 일본 다도의 다실인 것이다. 초의선사가 기거하고 또 즐겨 차를 마신장소로 일지암을 손꼽고 있는데, 그것이 초의선사의 여러 다실이라는 개념속의 한 장소로서 취급될 수는 있을 지언정, 유일한 차를 마시는 장소로서 의미하는 것은아니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러한 형식이 우리의 다실이냐 일본식이냐라는 논쟁은 그렇기 때문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필자는생각한다. 다만, 현대의 다도생활속에 좀더 자신이 여유가 있어서 복잡한 문명이기가 보이지 않게 새로운 생활공간을 만들고 조용히 명상할수도 서재로도 될 수있고, 차까지 만들어 마실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어 별도로 설계하여 사용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다실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차라는 그 자체가 몸에 좋고, 또 자신이 마셔서 정신건강에 도움이되며 한 순간이라도 복잡한 기계문명속에서 자유롭게 해탈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것일 것이다. 차가 우선이며 차를 마시는 장소는 한참 뒤의 부가적인 것임을 깨닫는다면 다실의 존재유무와 다실을 가지고있다고 훌륭한 다인 운운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눈에 들지도 않을 것이다.

^_^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