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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도문화사

[출처 : http://www.aichado.com/ 비봉 김진홍]

아래의 글은
[일본의 다도문화(도서출판 리수, 근간)]의 내용중 일부를 독자들을 위해 도서출판 리수 측의 양해를 얻어 [월간다도]지 2003년 1월호에 연재된 내용입니다.-비봉 김진홍-

제1회 일본의 차의 전래와 음다의 기원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다도계가 양적 질적 팽창을 거듭해오면서 호불호를 떠나 중국이나 일본의 다도문화에 대한 관심은 필연적으로 고조되어 왔다. 그리고 국내에 소개된바 적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 일본측 연구가 그대로 소개되는 부분이 적지 않아 필자는 그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각도와 객관적 시각에서 재 해석해보고자 노력하였다. 앞으로 본지를 통해 독자들과 함께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일본! 정확하게 말한다면 일본열도에는 언제, 누가 차(茶)를 전래한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역시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로 보건대 '분명하지는 못하다'는 것이 정답이라 할 수 있다. 식물학적으로 차(茶)가 일본에서도 생장하고 있었다는 자생설(自生說)과 중국대륙이나 인도 등 동남아시아지역으로부터 도래인(渡來人)<주1>이나 일본열도의 집권층이 파견한 유학승 등에 의해 전래되었다고 하는 도래설(渡來說)이 있지만<주2>, 명쾌한 결론은 아직까지는 내려지지 않은 상태라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대체적인 입장은 아무래도 도래설쪽에 많은 무게가 실려진 느낌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식물학적인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관계로 사실 필자의 연구범위를 벗어나는 데다 음다를 통한 다도생활 다시말해 다도문화사적 접근방법에 있어서는 그리 중심과제가 아니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생략한다.

  우리나라가 비록 현재의 영토개념으로 반도라 불리긴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동안 대륙과 인접하여 이를 정복하며 확장된 영토를 보유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만큼 우리와 중국대륙과의 교류는 중국역사의 기원과 거의 동일선상에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현재까지의 여러 사서의 기록에 의해 판단해 보건대 일본열도와 중국대륙간의 문화적 교류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시대가 내려가는 8세기무렵의 수(隨), 당(唐)시대에 이르러서야 이윽고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차문화사를 다루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서기 760년경 중국의 당시대에 출현한 [다경(茶經)]<주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이미 견당사(遣唐使)<주4>를 보내고 있던 일본이었으므로 입당(入唐)하였던 유학승들에 의해 이 책이 일본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다경] 자체는 아닐지라도 이미 이러한 저서가 나올 정도로 중국에서는 음다문화가 확산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바, 견당사들에 의해 당나라의 음다풍습이나 차의 수입, 그리고 일본내의 유학파 스님들간의 음다생활은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본에서 차를 처음으로 마신 기록으로 [사광년중행사(師光年中行事)]에는 쇼무천황(聖武天皇)의 텐뾰우(天平) 원년(729년) 4월 8일자 기사를 인용하여 백명의 승려들을 초대하여 대반야경(大般若經)을 강독하고 그 둘째날에 행다의 의식(行茶の儀)을 치루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일본의 귀중한 유물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 등에는 차(茶)가 아닌 도(씀바귀 도)자로 기록된 약용의 기사가 있음을 근거로 이때에 차가 약용으로 음용되고 있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많다. 아울러, 일부 다인들의 저서에는 정창원창고에 쇼무천황이 사용하였다는 청자다완이 많이 남아 있음을 근거로 제시하지만, 필자의 그동안의 연구로 판단해볼 때 당시의 중국 도자사상 청자의 출현, 사용연대와 이 8세기의 기록과는 상호 합치되지 않는 점이 너무 많아 근거로 채택하기에는 너무 희박하다. 사실 일본내에서도 이와 관련 상세한 것은 입증 곤란하기 때문에 학술적인 측면에서 전문가들의 논의는 대체로 부정적 견해가 많은 편이다.

  일본의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84년)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지배계층에게는 대륙의 선진국인 당(唐)의 풍물과 정치제도는 항상 동경과 주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견당사나 유학승들의 관심은 대개가 당나라 국정(國政)의 파악이나 불전(佛典)의 수집에 열광적이었지 일종의 기호음료 중 하나였던 차(茶)까지 전할 정도로 당나라의 생활문화에 정통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일설에 따르면 엔랴쿠(延曆) 24년(805)에 고승 사이쇼우(最澄)가 귀국시에 차의 종자를 가지고 돌아와 이를 치카에지방 사카모토의 히요시사(近江 坂本 日吉社)에 심었다고 한다. 현재 일본 최고(最古)의 다원이라는 히요시다원(日吉茶園)이 있고, 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차수(茶樹)도 있다고는 하지만 이 또한 그 진위여부에 대해서는 전설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일본내의 각종 다서에서 확실한 것으로서 가장 많이 언급하는 기록이 있다. 일본후기(日本後記)의 코우닌(弘仁) 6년(815) 4월 22일조의 기록이다. 기록의 내용은 [사가천황(嵯峨天皇)이 오우미(近江)지방 카라사끼(韓崎)에 행차하였을 때, 본샤쿠지(梵釋寺)를 지나 어가를 멈추고 시(詩)를 부(賦)하며...(중간생략) 에이츄우(永忠) 스스로 차를 달여(煎) 헌상...]이라는 부분이다. 이 때 승 에이츄우가 헌상한 차에 대하여 앞서 언급한 사이쇼우가 심었던 차 다시 말해 일본차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사이쇼가 귀국한 것이 엔랴쿠 24년(805)이므로  묘목이전이 아닌 차씨를 뿌린 것 이라고 할 경우에는 불과 10년생의 차를 사용했다는 말인데, 이것은 조금 믿기가 어렵다. 차라는 것이 물론 씨를 뿌리고 난후 3년생부터는 찻잎을 수확해서 차로 만들 수 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당시의 천황에게 헌상 운운하는 상황을 감안해 보면 고급차인 중국산의 차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적어도 80년은 경과한 묘목에서 딴 차가 제맛을 낸다고 하므로 이 기록을 그대로 믿어 에이츄우가 차맛을 아는 당시의 다인이었다면 분명히 10년생의 찻잎으로 차를 천황에게 바치지는 못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에이츄우가 당시 차를 달인 기법은 당나라에 유학한 승려였으므로 당연히 몸에 익히고 배인 중국식의 끽다법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같은 기록에 따르면 사가천황은 동년 6월에 기나이(畿內) 및 치카에(近江)·단바(丹波)·하리마(播磨) 등의 지방에 차를 심고 매년 이것을 헌상하도록 하는 칙령을 내린다. 여하튼, 이 시기의 한시집(漢詩集)에는 사가천황을 위시한 당시 지배계급의 다시(茶詩)가 많이 수록되어 있음을 감안해 보면 식물학적인 차의 전래시기는 확인할 수 없다 하더라도 차문화사적인 시각에서는 충분히 이 때쯤에는 음다의 풍습이 일본열도에도 전해졌을 것이라고 보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국내 정치가 혼란기를 겪는 등 여러 사유로 인해 견당사는 884년경 폐지되고 만다. 당초부터 크게 융성하였다고는 보기 힘들던 일본내의 끽다의 풍습은 사원 등지에서 절기에 따른 독경시의 의식적 다례 외에는 일단 단절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다음호에서는 일본내의 본격적인 음다문화가 정착되는 가마쿠라시대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이상)

<각주>
(주1)  선진문화 집단의 이동이나 이주가 귀화가 아니라는 우리 학계의 노력하에 이제는 건너간 사람이라는 뜻의 도래인 이라는 용어를 예전의 귀화인(歸化人)이라는 표현대신 사용하고 있다.
(주2) 다도학의 권위자인 김명배 선생의 [일본의 다도(26-33쪽, 보림사간)]에 자생설과 도래설에 대하여 상세한 출전과 함께 정리가 되어 있으므로 관심있는 독자들은 참고바란다.
(주3) 당나라의 문인 육우(陸羽)가 쓴 세계 최고(最古)의 차와 관련한 저서로서 차의 기원, 역사, 도구, 제조법 및 음다법 등이 기록되어 있다. 
(주4) 중국의 선진문물의 도입과 문화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반관반민의 성격을 띤 당시의 외교사절이라 할 수 있다.

 

아래의 글은 다도문화사 1과 같이 [월간다도]지 2003년 2월호에 연재된 내용임.
- 비봉 김진홍 -

제 2 회  에이사이(榮西)와 일본차(日本茶)의 기원

  중국과의 문물교류가 끊어지면서 일본내에는 음다문화가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것과는 달리, 중국대륙에서는 당(唐)의 뒤를 이은 새로운 왕조인 송(宋代)에 들어선 이후에도 더욱 차문화가 발달하는데, 특히 양츠(揚子)강 유역에서의 차수 재배는 매우 융성하였다. 왕조가 바뀐 탓인지 음다문화의 확산과 발전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인지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 즈음에는 새로운 차의 음용법이 등장하게 된다. 찻잎을 끓여 마시던 이른바 자차법(煮茶法) 대신 가루차를 이용한 점다법(點茶法)이라 부를 수 있는 방식의 음다법<주1>이 유행하게 된다. 이 가루차의 음용법은 다완만 있으면 어디에서도 마실 수 있는 데다 끓여서 마시는 차(煮茶法)보다도 맛있었다고 생각된다.<주2>

 헤이안(平安)시대 후기에 이르면 그동안 중국에 대한 관심이 비록 희박해진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새로이 대륙의 통일왕조를 이룬 송(宋)에 유학하려는 승(僧)들은 끊이지 않았다. 엔큐(延久) 4년(1072)에 입송(入宋)한 고승 죠우싱(成尋)은 다음해 정월 상원절(上元節)에 송조(宋朝)로부터 차와 과자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시기적으로는 마침 당을 거쳐 송시대에 새로이 나타난 음다법(點茶法)이 이미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였지만 그는 본국 일본으로 귀국하지도 못한 채 객사하고 만다. 

 차가 마시는 음료로서 각광을 받고 또 음다풍습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것은 가마쿠라바쿠후(鎌倉幕府1184-1329)시대부터라고 보는 것이 필자는 물론 일본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등장하는 사람이 에이사이선사(榮西禪師)이다. 그는 일본의 불교중흥에 크게 이바지 하였고 선종인 린자이슈(臨濟宗)를 개창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일본에 차를 전래시킨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헤이안말기이자 가마쿠라바쿠후시대의 개막 일년전에 해당하는 때에 중국유학을 마치고 귀국<주3>한 에이사이는 전설에 따르면 겐큐(建久)2년(1191)에 히젠(肥前)지방 히라토(平戶島)의 이우라(葦浦)에 착안하였으므로 즉시 차종자<주4>를 히젠지역과 추쿠젠(筑前; 지금의 후쿠오까일원)지역의 경계에 해당하는 히젠 세부리산 남쪽 기슭(背振山 南麓)에 자신이 세운 영산사(靈山寺)의 서쪽 계곡(西ヶ谷) 근방에 심었다고 한다.
  
  지난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차가 일본에 전래된 이래 대략 450여년이 지나는 동안 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일본열도내의 끽다문화가 다시 한번 이 에이사이에 의해 일본에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일본내의 차의 생산이 이루어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일본 다도문화사에 있어서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일본내에서는 이 에이사이가 심은 세부리산의 차씨가 차나무로 자라남으로써 일본의 차생산이 시작되었고 일본산 차 즉 일본차(日本茶)의 기원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진 듯 하다. 결국 이것은 현재 일본차중 이와가미차(石上茶)라 불리는 차의 원조로 취급받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는것도 사실이다.<주5>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에이사이가 큐슈(九州)의 세부리산에 차를 육종하였다는 것은 당연히 차의 재배법, 제차법, 음다법 까지도 새로 출범한 카마쿠라바쿠후의 지배계층에 전하였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으로서 두가지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바로 가마쿠라바쿠후의 쇼우군(將軍)에게 차를 헌상하였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일본 최초의 다서(茶書)라 할 수 있는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의 저술이라 하겠다. 

  우선, 에이사이는 겐뽀우(建保) 2년(1214) 가마쿠라바쿠후의 3대 쇼우군에 해당하는 미나모토노사네토모(源實朝)에게 양약(良藥)이라 칭하여 차를 한잔 바쳤다고 한다. 물론 이 당시는 그가 린자이슈의 개조로서가 아니라, 텐다이슈(天臺宗)의 승정이라는 위치였다. 이 때 장군은 일설에 의하면 숙취로 괴로워했다거나 병에 걸려 있었다고도 하지만 모두 믿기는 어렵고 그만큼 당시의 최고 권력자였던 쇼우군과 에이사이간에는 적어도 차를 매개로 한 정치적 교류가 시작되었으며, 차가 당시의 최고지배계급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리라 생각한다. 아울러 그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새로운 음다법이었던 점다법이 일본의 지배계층에 골고루 확산 전파되는 계기를 제공하였으리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두 번째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저술인 [끽다양생기]에서 특히 「차는 양생(養生)의 선약(仙藥)이요, 장수(延齡)의 효험(妙術)이 있고」라 하여 차의 약효를 들고 있어 크게 환영받았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다. 에이사이는 그런 의미에서 일본 불교사에 있어서 선종계통인 린자이슈우(臨濟宗)의 개조(開祖)임과 동시에 차의 재배와 음용법(抹茶法)을 전하고 일본최초의 다서라 할 수 있는 [끽다양생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다조(茶祖)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끽다의 성행과 더불어 그것에 이용되는 기물들도 중국과 고려 등으로부터 대량 수입되고 카라모노(唐物)라 불리며 애용된다.<주6>

 가마쿠라 엔가쿠사(鎌倉 円覺寺)의 [공물목록(公物目錄)]<주7>에는 이후의 일본다도사에서 언급되는 다이에(大惠)의 묵적(墨跡)이나 동제(銅製)화병, 청자, 건잔(窯變, 油滴 등)의 다완명 들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다기들이 이미 이 시대에 수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에이사이는 가지고 돌아온 차씨를 세부리산에 심은 것은 물론이고 교토 도가노오(梅尾)의 묘에상인(明惠上人)에게도 보냈다고 한다. 묘에는 화엄종의 부흥에 심취하고 에이사이로 부터 선(禪)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었기에 선의 수행중에 각성제로서 차를 애용하였다고 하지만 이 또한 그 진위를 알기는 힘들다. 다만, 오늘날 고산사(高山寺)에는 당시 에이사이가 차씨를 묘에상인에게 보낼 때 담았던 용기라 전해지는 중국산의 가끼노베타(枾 )의 차이레(茶入)가 있기는 하다. 그리고 도가노오는 그 이후 일본내의 명차의 산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에이사이가 활동하던 시기 이후에 입송한 고승 쇼이치국사(聖一國師;1202-1280)가 다례(茶禮)를, 도우겐선사(道元禪師), 다이오우국사(大應國師; 1235-1308)는 예식을 전하는 등 이후 일본다도의 각종 예의작법형성에도 어느 정도 기초적인 영향은 주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 중 도우겐(道元)선사는 수도생활중에 끽다, 행다, 다이자사토우(大座茶湯)라는 다례를 정하였지만 이것은 현재와 같은 음다생활을 통하여 도(道)에 이른다고 하는 일종의 다도철학이 형성되었던 것 같지는 아니하며 일종의 차를 마시는데 따른 음다법에 관한 다례이자 예법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방선(南方禪)의 종파는 차의 각성효과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데다 참선의 의식중에도 끽다의 예법을 채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내의 선종의 확산과 함께, 선종의 청규(淸規)<주8>속에 있는 「다례(茶禮)」도 자연스럽게 행해지게 되었다. 도우겐은 송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에치젠(越前)에 조도우슈(曹洞宗)의 본산인 에이헤이사(永平寺)를 창건함과 동시에, 『영평청규(永平淸規)』를 정하였다고 하는데 그 속에는 다례도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는 적어도 일본내에서 차가 생산되었고, 에이사이의 영향 등도 있어 유학승들을 중심으로 한 음다문화가 비교적 융성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다음호부터는 일본다도의 창세기라 할 수 있는 무사계급사회에서의 차요리아이(茶寄合)의 성행 등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이상)

<주석>
(주1) 같은 가루차를 음용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오늘날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이 시기의 가루차는 단차(團茶)라고 하여 잎을 쪄서 방아로 찧어 굳힌 것이었다. 그래서 차를 마실때에는 그것을 적당하게 깍거나 갈아 분말화하여 다완속에 직접 찻가루를 넣고 위로부터 열탕을 부어 찻솔(茶선)로 휘저어 마시는 방법이었다.
(주2) 이 음용법은 중국의 황우(皇祐) 3년(1053)에 송의 인종(仁宗)의 신하였던 채양(蔡襄)이 쓴 [다록(茶錄)]이나 이어서 휘종(徽宗)이 저술하였다고 하는 [대관다론(大觀茶論)]에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주3) 에이사이는 1168년 4월에 입송하였다가 그해 9월에 귀국한 후 다시 1187년 3월에 입송한 뒤 1191년 7월에 4년간의 유학승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당시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할 경우에는 차종자의 생장시기 등을 감안해볼 때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주4) 혹자는 에이사이가 차씨를 가져왔을 경우 그의 귀국시기상 차씨가 정상적으로 발아하기 힘든 때임을 이유로 묘목을 통째로 파서 가지고 왔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확실치 않다.
(주5) 김명배, 일본의 다도(44-47쪽), 보림사 참조
(주6) 정확한 시기가 일치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중국의 송과 명의 세대교체기에 잠시 송조를 멸망시키고 중국대륙을 통치한 원시대에도 일본은 중국과 고려로부터 많은 물품을 수입하였다. 원시대에 한중일간의 무역선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침몰선으로부터 많은 유물이 신안앞바다에서 인양된 적이 있는데 그 일부가 현재 목포의 [국립해양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일본의 음다문화가 다양하게 발전하는 가마쿠라시대에 사용되던 중국 건요산의 건잔(建盞; 천목다완)은 물론 단차를 가루로 만들기 위한 차멧돌 등도 함께 발굴되어 이곳에 전시되고 있어 그 당시 일본의 음다문화의 성행과 고려, 송원으로부터의 미술공예품 수입규모에 대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주7) 가마쿠라(鎌倉) 엔카쿠사의 불일암(佛日庵)의 공물목록으로 송원화(宋元畵)의 목록으로서는 최초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8) 당시에 선종유파에서 각종 규율(規律)을 정한 것을 「청규(淸規)」라고 하여, 중당(中唐; 당나라의 중기)시절에 백장회매선사(百丈懷海禪師)가 대성하였다고 전해지는 『백장청규(百丈淸規)』가 그 기본을 형성하고 있다. 그 후 이 청규는 시대가 흐름에 따라 몇 번이고 만들어졌지만 문종황제(文宗皇帝) 시대에 정해진『칙수백장청규(勅脩百丈淸規)』에는 점다(點茶)의 방식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선종으로부터 파생 발전된 일본 다도의 기본적인 정신과 동작은 실상은 이러한 선종의 의식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이 많은 것이다.

 

아래의 글은 월간 다도지 2003년 3월호에 연재된 내용입니다.-비봉 김진홍

 <일본다도의 창세기 - 투차회에서 서원차의 완성기>

■ 카라모노(唐物)의 수입과 카이쇼(會所)에서의 음다
  끽다의 풍습은 선승들 사이에서만 유행하다가 이후에는 무가계급에까지 파급된 것이지만, 아시카가(足利)장군시대(1336-1568)의 초기에 이르면 더욱 확산되어 일반계층까지도 유행하게 된다. 주1)
(주1) 무소우(夢窓)국사의 [몽중문답(夢中問答)]중에 [近頃世間てけしからず茶をもてなさる]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만 보더라도 끽다의 풍습이 급기야는 사치로 흘러 유희화 되고 있었음을 짧은 문장이긴 하나 엿볼 수 있다.

   가마쿠라바쿠후(鎌倉幕府)시대 후기에 카라모노(唐物; 2월호 44쪽 참조)가 수입되며 새로운 차문화가 등장하게 된다. 손님들은 식사와 술을 대접받은 이후에 외국산 수입고가품인 카라모노가 장식되어 있는 방으로 옮겨 그곳에서 차를 마시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가 되면 지금까지 주로 약용 등 건강음료의 성격이나 다례의식 일변도의 음다 풍습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이사이의 새로운 끽다 방식이 최고위층인 가마쿠라 바쿠후의 장군가에 소개된 이래, 가마쿠라 말기에서 무로마치(室町幕府)초기에 걸쳐서는 각급 무사들사이에 끽다의 풍습이 많이 확산 보급되고 중국의 명전(茗戰; 차의 탕품 등과 관련한 차겨루기)이 소개되면서 일본화된 새로운 형태의 차회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특히 무가계급에서는 이 풍조가 현저하여 [타이헤이키(太平記)주2]의 기록 중에 나타나는 사사키도우요(佐佐木道譽)<주3>의 차회만 보더라도 화려한 비단의복을 입고, 산해진미로 호식하며, 차회가 끝나면 도박을 시작하는 형태였다.

(주2) 1370년경에 성립된 일종의 군사기록물이다. 총 40권으로 구성되어 일본 남북조시대의 약 50여년간의 전란기록으로 작자는 [도잉고테이닛키(洞院公定日記)]에 의해 고지마법사(小島法師)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투차에 관한 현상품에 대한 과장이 심하지만 그만큼 당시 무장들의 놀이문화나 사회정세를 실감있게 묘사하고 있어 일본다도사는 물론 일본문화사의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주3) 이름은 다카우지(高氏)이고 법명은 도우요(道譽)인데 남북조시대에 아시카가장군(足利尊)에게 충성하며 무로마치바쿠후(室町幕府)창설에 큰 공을 세웠던 다이묘(大名)로서 수호령도 치카에(近江)외에 두 개 지방까지도 통합 관리하였던 당시의 최고권력자중 한사람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차회라는 것은 현대 일본 말차도의 차노유(茶湯)와는 달리 투차 또는 차요리아이(茶寄會)라 불리던 것으로서 수 종류의 산지가 틀린 차를 서로 마신 후 그 차의 산지나 본차(本茶), 비차(非茶)를 감별<주4>하고 그 진위여부에 경품을 거는 일종의 차를 빙자한 도박모임을 말한다. 당시에 속칭 백복차(百服茶), 오십복차(五十服茶)라 불렸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주5>
(주4) 이 투차는 일본내의 기준으로 진짜 차 내지는 유서있는 차인 본차(本茶)와 그 외의 것인 비차(非茶)를 알아 맞추는 경기였다. 여기서 말하는 본차란 교토(京都), 도가노오(梅尾)의 묘우에(明惠)상인이 심었다는 도가노오산(梅尾産) 차를 뜻하였고, 비차(非茶)는 우지(宇治)를 대표한 기타 지역산의 차를 의미하였다. 물론 훨씬 시대가 내려간 후의 일이긴 하지만 본차의 지위는 도가노오차로부터 우지차로 넘어가게 된다. 아울러 여타 지방에도 호족들의 옹호하에서 여러 종류의 차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주5) 차겨루기에 대한 다른 측면의 상세설명은 전게서, 일본의 다도(김명배), 61-67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전란중에 유행하였던 이 모임이 그후에도 계속 성행하자, 바쿠후에서는 겐부(建武) 3년(1336)에 포고를 내려 도박이나 차회, 연가회 등으로 불리던 도박목적의 집회를 금지하게 된다. 당시 이러한 사치한 차모임을 주도적으로 개최한 것은 전란으로 세력을 많이 잃은 공가(公家)<주6>들 대신 새로이 권력과 세력을 얻게 된 신흥무가나 다이묘(大名; 지방영주)들이었다.
(주6) 천황의 친인척 등 귀족의 가문을 말한다.

 무로마치시대의 선승 겡에(玄惠)의 기록으로 추정되고 있는 [끽사오우라이(喫茶往來)<주7>]에 따르면 이 차모임의 점다는 주연을 먼저 가진후에 행해진다. 장소는 [끽다지정(喫茶之亭)]이라 불리던 건물에 일동이 모이면 테이슈(亭主)<주8>의 아들이 과자를 가지고 나오며, 젊은 시동은 건잔(建盞)<주9>을 하나씩 배포한다. 이후 왼손에 탕병을 들고 오른손에 다선을 가지고 나와 상객부터 말객까지 한사람씩 차를 점다해 주게 된다. [순서는 난잡하지 않으며]라고 쓰여 있는 점을 볼때 그 모습은 질서정연한 것이었던 것 같다. 
(주7) 무로마치시대 초기의 끽다풍습을 기록한 책으로서 투차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는 책이다. 두 개의 왕복서간문(총4통)으로 이루어져 그중 하나는 차회에 대하여 나머지는 점다법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그 저자에 대하여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주8) 현대 일본의 말차도에서 다실안의 차회를 주관하는 다인을 테이슈라 부르는 것은 이때부터의 풍습에 기인한다. 하나 엄격히 말해 끽다지정의 형식과 에도중기이후 완성된 현재 전해져 내려오는 다실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주9) 중국의 건요(建窯)산의 다완을 말하며 일명 천목다완이라 불리는 흑유계통의 다완을 말한다


■ 차요리아이(茶寄合)의 성행
 이 즈음에는 종파를 초월하여 차가 보급되고, 좌선의 목적만이 아니라 차의 효능의 인지에 따른 문사들의 면학에도 유용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효능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순수한 의미에서의 기호음료로서의 측면은 매우 부족한 일종의 효능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순수한 기호적인 측면에서의 음다문화를 지향하는 차모임이 정권안정에 따른 각 지방문화의 발전과 연계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에 차요리아이(茶寄合)라 불리던 차회였다. 비록 차회(茶會)라고는 하나 시문(詩文)을 읊는 모임이나 음주 향연 등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던 유희적 모임이었음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사치풍조에 대해 무소우국사(夢窓國師)는 차의 악용을 경계하기도 한다. 그는 선종을 일본식으로 조정하여 확산시킨 고승이었고 인품도 높아 남북조시대의 양 조정으로부터도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는 와카(和歌)<주10>를 애호하였던 사람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때에 예전에 송(宋)으로부터 수입한 다이스(臺子)를 이용한 장식법을 정하는 한편 다례(茶禮)를 부흥시키기도 한다. 점차 음다생활은 시가(詩歌)와 함께 당시 귀족 무사계급의 교양필수과목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주10) 일본식 노래로서 요즈음으로 말하면 단카(短歌)라 불리는 형식과 유사하다. 하이쿠(俳句)는 5, 7, 5의 음이지만, 이 하이쿠에 후렴조로 7,7을 더하면 단카가 된다. 즉, 5,7,5,7,7 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율종(律宗)의 자선활동 등을 통해서도 차가 일반민중에게 보급됨으로써 점차 끽다가 귀족의 전유물에서 벗어나게 되는 데 당시 일반 민중들 사이에 보급된 끽다문화는 「운카쿠(雲脚)」라 불렸다. 이것은 차를 마시되 귀한 차를 많이 넣지 못함에 따라 점다하여 생긴 거품이 쉽사리 꺼져 버려 이것이 마치 [뜬구름(浮雲)의 다리가(脚) 재빨리 지나가 버리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시대흐름에 따라 귀족적인 차모임(茶寄合)과 대중적인 차생활(雲脚茶湯)이라는 두 개의 음다문화가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영국에서 귀족들이 값비싼 홍차를 스트레이트로 즐길 때 서민들은 밀크를 섞어 차를 마심에 따라 밀크티가 확산된 것을 연상시킨다.
 무로마치바쿠후(室町幕府)의 3대장군 아시카가요시미츠(足利義滿)는 간고우센(勘合船)<주11>에 의한 대중국무역을 부활시킴에 따라 고려, 조선산의 물품까지 포함된 수입품(唐物)은 더욱 풍부해 지게 된다. 장군가 주최의 차모임도 중국풍(唐風)의 선종문화(禪宗文化)의 하나로서, 다례(茶禮)는 무가귀족계급의 예법(武家禮法)으로 정착되게 된다.
(주11) 당시 바쿠후로부터 정식으로 대외 중국이나 고려와 교역을 할 수 있도록 허가받은 무역선을 말한다.


■ 무가계급의 서원차(書院茶)형식의 완성
 무로마치바쿠후의 6대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敎)시대에 이르면 점다와 음다를 함께 하는 현대 일본 다도에서 다실이라 불리는 공간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차모임의 장소인 차노유노마(茶湯の間)가 성립된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중국에서 도래된 선종문화 대신 왕조귀족들의 가도문화(歌道文化)가 위세를 떨치게 된다. 초기의 다도라는 용어와 개념적으로 유사하게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는 차스키(茶數寄)<주12>라는 말이 처음 나타나고 이어서 차노유(茶湯)라는 차회를 뜻하는 명칭도 보급되기 시작한 듯 하다. 
(주12) 차스키(茶數寄)라는 정확한 어의는 확실치 않지만, 필자는 차를 즐긴다(好; 일본발음 스키)는 발음에 작은 수의 사람들(數)이 모이는(寄; 요리아이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장소적인 의미와 모여 차를 즐기거나 마신다는 전체적인 추상적 의미가 합쳐진 것이 아닐까 싶다. 이후 이것이 발전하여 차만을 목적으로 모이는 것이므로 스끼(數寄)대신 차노유(茶湯)가 사용되고, 이번에는 이러한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스끼샤(數寄者)나 차노유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차노유샤(茶湯者)라는 용어로 발전하여 나간 것이라 보고있다.

  무가 귀족들은 훌륭한 저택과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아시카가장군은 광대한 주거지나 별장을 짓고 그 안에 카이소(會所)를 만들었다. 이것은 현대 일본다실의 고조 정도에 해당하는 차와 관련된 건축공간이라 할 수 있다. 때에 따라 무가계급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모아 모임을 개최하거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히로마(廣間; 넓은 방)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다이코지(醍 寺)의 산보인(三 院)에 적을 두고 있던 만사이(滿濟; 1378-1435)<주13>의 기록인 [만사이쥬고우닛끼(滿濟准后日記)]에 따르면 아시카가요시노리장군이 시도한 좌석장식의 훌륭함에 만사이는 매우 감탄하고 있다. 요시노리의 장식을 묘사한 당시의 기록에는 28개의 방에 1,000여점에 이르는 도구들을 장식하였다고도 한다. 그 도구들 중에는 유적천목다완(油滴天目茶碗)이나 목계(牧谿)<주14>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등의 이름도 보이고 있어 당시 장군가에서 얼마나 많은 명품들을 모으고 있었는 지를 대변해주고 있다.
(주13) 만사이는 무로마치 전기의 밀교 종파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진언종(眞言宗)의 승려로서 아시카가요시미츠(足利義滿)장군의 양자가 되어 아주 극진한 대우를 받았었던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14) 13세기 후반경의 중국 남송시대에 활동한 화승(畵僧)으로 서호 육통사(六通寺)를 개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소상팔경도외에 나한도(羅漢圖)도 그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차모임을 위한 별도의 넓은 방 다시 말해 서원풍(書院風)이라 불리는 카이소(會所)의 건축양식도 점차 정형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카이소에서의 좌석배치나 장식방법에도 연구가 거듭되어 넓은 방안의 서가 등에 소수의 도구만을 장식하는 등 새로운 형식의 미를 감상하려는 방식도 고안, 시도되기 시작한다.
 당시 장군(足利義政)의 도보슈우(同朋衆)<주15>였던 노아미(能阿 )가 역시 중국산 다이스를 이용하여, 천목다완이나 시루기(汁器; 국을 담는 공기) 등을 잘 조합시켜, 다이스가자리(臺子飾)<주16>라는 다식(茶式)을 만들었다. 이 다이스장식에 있어서 다도구를 배열하는 정신적 바탕 속에는 당시의 권력자였던 만사이 등의 영향력도 상당히 강했기 때문에 일월천지우주(日月天地宇宙)라는 일본 밀교(密敎)의 종교적 사상이 자연스럽게 일본다도의 다례형식속에 스며들게 되었고 그 흐름은 현대의 말차도에도 일부 전해지고 있다. 일본의 다도가 선종과 밀교 양측의 정신과 사상을 혼합한 형태로 완성되는 과정은 결국 우리나라의 다도와 비교해볼 때 큰 차이를 이루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주15) 도보우슈우는 바쿠후의 장군에 대한 문화방면의 이야기 상대나 자문관, 보좌관격으로 뽑혀 활동하던 예능인들을 말한다.
(주16) 이단 내지 삼단으로 이루어진 서가에 다도구를 장식하는 방식


 오늘날 일본 다실의 장식은 바로 이 무로마치시대에 만들어진 서원(書院)의 다이스를 이용한 장식법이 초석이 된 것이다. 때문에 이 시대이후에 활동하는 다인들인 다께노죠오우나 센노리큐 모두 중세 다도의 기틀을 확립 발전시켜 나가는 가운데, 형식적인 다례법을 통합시킬 때는 서원의 차(書院茶)와 초암의 차(草庵茶; 다음호에서 다룰 예정)를 적의 혼합하게 된다. 
 한편, 이 시기는 대부분이 다른 곳에서 점다하여 내어 오는 것이 보통이었다.<주17> 하지만 특별한 도구를 취급한다거나 축하행사와 같은 경우에는 손님들 앞에서 직접 점다하는 경우도 있긴 하였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동석하는 방식으로 점다장소가 옮겨지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의 점다에서, 궁전의 낭하에서의 점다, 그리고 일부 사원에서는 출입구 양측면에서의 점다 등 상당한 시간상의 추이를 거쳐 정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센노리큐(千利休)의 활동기까지 이어지게 되지만 결과론으로 놓고 본다면 그만큼 서로간에 믿지 못하던(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독살가능성 등) 무인정치라는 특수한 사회정치적 배경하에서 귀착된 것이며, 당시의 다례와 절묘하게 배합, 고안된 방식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주17) 별도의 장소에 [다탕소(茶湯所)]와 같은 곳이 있었다. 이것은 이후에 현재 일본의 다실에 붙어 있는 부엌인 미즈야(水屋)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부분은 크게 일본다도 창세기의 전반기라 할 수 있는데, 무가귀족사회의 화려하고 격식있는 이른바 서원의 차가 비로소 일정한 형식과 예법을 갖춘 차회로 완성된 시기였다고 정의할 수 있다. 다음호에서는 이러한 서원차의 풍조와 대비적인 일본 다도의 기틀을 마련한 무라타쥬코우(村田珠光)의 초암차의 태동을 알아보면서 일본다도의 창세기를 마무리짓고자 한다.

 

일본다도문화사 제4회(월간 [다도] 2003.4월호 수록분)

무라타쥬코우(村田珠光)와 초암차(草庵茶)의 태동-일본다도의 창세기
                                                                                   비봉   김진홍

■ 와비차(侘茶) 개념의 탄생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일본내에서 그동안 이어져 내려왔던 끽다문화에 있어 큰 전기가 마련된다. 그동안 차를 마시는 음다문화에 있어서 정신성에는 그다지 무게를 두지 않고 단순히 음다 자체를 주목적으로 한다거나 아니면 지난 호에서 소개한 서원차라 할 수 있는 중국이나 조선으로부터 수입된 미술공예품의 감상을 주목적으로 하던 차모임으로부터, 이때에 이르러 드디어 정신성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는 음다문화로 서서히 전환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다름 아닌 일본 다도의 철학이라 할 수 있는 와비차(侘茶)의 탄생이 바로 그것이다.
 화려한 다이스의 장식으로 둘러싸인 이른바 서원양식의 차로부터 검소, 절제, 소박미를 미덕으로 삼는 초암(草庵)의 다법을 채택하는 차노유(茶湯)1), 와비(侘び)2)라는 새로운 미학에 입각한 신개념의 음다법이 바로 이 무로마치시대의 히가시야마(東山殿)에 있던 아시카가요시마사(足利義政)장군을 섬기고 있던 승려인 무라타쥬코우(村田珠光; 1423-1503)에 의해 창시되는 것이다. 당시 장군은 감성이 뛰어나 서화나 다도구(茶道具)의 선별에도 힘을 쏟으면서 도보슈우인 소아미(相阿 ) 등을 시켜 차노유(茶湯)의 환경을 정비하는 한편, 다기(茶器)를 엄선함으로써 끽다문화의 일본화(和風化), 풍류화(風流化)에 기여하는 바가 컸다. 이 때는 장군가의 나름대로의 다법이 완성되었다고는 하지만 귀족적인 풍류3)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주1> 일본에서 다탕(茶湯)의 한자를 차노유라 부르는 것은 말그대로의 차를 우려낸 찻물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요즈음의 다도의 행다과정 전반을 일컫는 말이다. 이 다탕이라는 한자어로서 다도의 행다를 뜻하는 개념은 일본에서만 사용된 것은 아니며,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도 다탕의 도구라는 표현으로 짐작컨대 당시 우리나라 왕실에서도 행다의 의미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2> 와비라는 개념은 사실 필자는 물론 일본의 다인들도 감각적으로는 깨닫고 있지만, 한마디의 말로 설명하기 위해 글로 나타내는 설명은 자신이 없어 하는 어려운 관념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선승들이라면 알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본서에서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일반 사전에서 정의한 해설만을 소개한다. 독자여러분들의 감성에 따라 적의 수용하였으면 한다. 사전적 정의로서 와비란 첫째, 한적한 생활을 하는 일, 검소한 취향(趣向) 영어로는 quiet taste이며, 둘째, 간결함이 지니는 멋으로서의 일본의 미적이념(美的理念)의 하나로 표현되고 있다.
<주3> 그러한 시대의 장군가 중심의 문화를 일본에서는 무로마치시대의 아시카가 장군이 히가시야마에 있었다고 하여 히가시야마분카(東山文化)라 부른다. 이러한 장군가에서 정립된 서원의 차는 히가시야마류(東山流)의 서원차(書院茶)라 부르고 있다.

 8대장군으로 취임한 요시마사는 무가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사에 전념하며 무장을 통솔하기보다는 조용히 자신의 취미에 몰두하는 취향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급기야는 세력을 응집시킨 지방영주나 무가들의 반란을 초래하면서 결국은 각 지방 영주들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란을 야기하게 되는 일본판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일본사가들의 견해도 많다. 여하튼, 그러한 진위여부는 불문하더라도 그러한 견해가 나올 정도로 그가 오산(五山)4)의 승려나 화가 등 무가보다는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를 넓히고 즐겼다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다.
<주4> 선종에서 최고의 사찰로 등급이 매겨진 곳을 의미한다. 중국의 오산제도를 흉내내어 처음에는 가마쿠라(鎌倉)에만 한정하였지만, 아시카가요시미츠(足利義滿)장군이 상국사(相國寺)를 건립한 시토쿠(至德) 3년(1386)에 임제종의 궁관사(宮官寺)제도로 확립되어 교토(京都)와 가마쿠라에 각각 오대사(五大寺)를 정하여 1-5위의 순위를 정하였다. 교토의 오산은 남선사(南禪寺)를 오산위에 두어 특별취급을 한후 텐류사(天龍寺), 쇼우코쿠사(相國寺), 겐닌사(建仁寺), 토우후쿠사(東福寺), 만쥬사(万壽寺)였고, 가마쿠라의 오산으로는 겐쬬우사(建長寺), 엔카쿠사(円覺寺), 쥬우후쿠사(壽福寺), 죠우치사(淨智寺), 죠우묘우사(淨妙寺)의 순위였다.

 쥬코우(珠光)는 민중적인 차요리아이(茶寄合)라 할 수 있는 이른바 린칸차노유(淋汗茶湯)5) 속에서 지낸 사람이다. 그것은 목욕문화와 차회가 혼합된 레크리에이션이었다고 한다. 

<주5> 나라(奈良)지방에서 시도된 다른 형태의 차노유라 할 수 있다. 전란으로 황폐화된 수도인 교토를 탈출한 귀족들중에는 후지와라(藤原)일족들의 사찰인 흥복사(興福寺)에 일신을 의탁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교토의 풍속이나 문화는 이 흥복사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신도들의 무리라 할 수 있는 자들에게는 특히 여름에 한해 설치되는 임간(淋汗이지만 林間이라고도 쓰는 사람이 있다)이라 불리던 차회가 있었는데 이것은 차노유에 장식적인 취향까지도 포함시킨 것이었다고 한다. 꽃꽂이를 장식하거나 욕탕기둥 위에 족자를 걸거나, 욕탕안에 대나무를 심고 산의 형상을 만들어 욕탕안으로 폭포처럼 떨어지도록 고안하는 등 지금 생각해도 고급사우나와 같은 곳에서 차를 마시는 기발한 놀이였던 것 같다. 

하지만 쥬코우는 다이토쿠사(大德寺)의 잇큐소우쥰화상(一休宗純和尙; 1394-1481)에게 다선일미(茶禪一味)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6) 쥬코우는 히가시야마류(東山流)의 차스키(茶數寄)라 할 수 있는 서원차도 달인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이러한 사치성 풍류 대신 일본다도의 기초를 정립하는 나라류(奈良流) 초암차(草庵茶)를 창시하여 장군에게 소개하게 된 것이다.

<주6> 쥬코우는 성(姓)이 무라타(村田)이고, 처음에는 나라(奈良)의 죠우묘우사(稱明寺)의 승이었지만 이후 잇큐선사의 문하에 들어가 선을 배웠다고 한다. 아울러, 그가 수행을 거듭하여 잇큐선사의 제자라는 인가(印可)의 표시로 엔고( 悟;1063-1135)의 보쿠세키(墨跡)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장군에게 초대된 쥬코우는 그로부터 다례(茶禮)에 관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받는다.  [쥬코우몬토우(珠光問答)]에 따르면 쥬코우는 각 질문마다 하나하나 명쾌한 답을 주었는데, 결론적으로 다례란 [일미청정법희선열(一味淸淨法喜禪悅) 조주시지기(趙州是知己) 육우개득(陸羽豈得) 도(到) 기가경(其佳境) 야(也)]라 하며, 일미청정법희선열이야말로 다례의 극치이며, 이 극치에 있어서는 조주(趙州) 즉 [끽다거(喫茶去)]를 늘상 주장하고 있던 중국의 고승도 나의 지기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다경을 쓴 육우라고 할지라도 이 경지(佳境)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라며 먼저 자신의 수행하는 다례(茶禮)가 중국식과는 다름을 설명하고 [기입(其入) 차실(此室) 자(者) 불(不) 리(離) 인아지간(人我之間) 내축(內畜) 유화지덕(柔和之德) 지(至) 교접상견지간(交接相見之間)] 즉, 차실에 들어가면 바깥은 사람, 우리의 공간을 잊고, 안으로는 유화의 덕을 쌓고 친근하게 서로 즐길 덕을 나타내며, [근혜(謹兮) 경혜(敬兮) 청혜(淸兮) 적혜(寂兮) 졸급(卒及) 천하태평야(天下太平 也)] 즉, 근경청적(謹敬淸寂)에 의해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고 하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바로 쥬코우가 밝힌 이 [근경청적(謹敬淸寂)]은 이후 센노리큐가 표방한 일본다도의 정신이라고하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의 뿌리를 이루는 것인데, 당시 쥬코우가 보여준 다례형식은 지금까지의 차회가 연회형식의 화려함을 위해 넓은 방이었지만 그것을 현재의 다실의 기준크기라 할 수 있는 다다미4개반의 공간만큼 병풍 등으로 둘러쌓고7) 점다를 수행한 듯 하다. 
<주7> 현대 다도에서 차실을 별도로 부르는 말로서 [가꼬이]라는 말이 있는 데 이 말은 주위를 가둔다라는 뜻으로서 바로 쥬코우가 넓은 방의 공간을 병풍으로 둘러쌓은 데서 유래된 말이다.

  그 이후 쥬코우는 더욱 더 높은 이상을 목표로 하여 다이스도 중국수입품의 주류였던 칠기류 대신 대나무나 일반 나무판으로 제작하거나, 상아로 만들어 전량 수입되고 있던 차사쿠(茶杓; 가루차를 뜨는 숟가락)를 대나무로 만들거나, 중국 등 외래품의 금속제의 하나이레(花入; 다화를 장식하는 화병) 대신 대나무를 잘라 만드는 등 하나하나 일본다도의 와비정신에 입각한 초암의 차노유를 완성시켜 나간다. 실상 일본의 다성이라 추앙받고 있는 센노리큐의 공적과 이 쥬코우를 서로 파격적인 다도철학의 완성이나 기물의 취사선택을 비교하면 단연 쥬코우가 다성이라 부르기에 부족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 일본의 다도계는 천가류의 영향력하에 오랜세월 지내온 관계로 쥬코우에 대한 평가가 그리 높지는 않은 편이다.
  쥬코우는 귀족적인 차스키(茶數寄)와 대중적인 차노유(茶湯)를 통합함으로써 일본다도의 기초를 확립한 선구자이자 다인(茶人)8)이라 할 수 있다. 쥬코우는 많은 명물다기(名物茶器)들을 남겼다. 도구에 관해 그는 카라모노와 일본국내산이라는 경계구분을 없애고 모두 같은 선상에서 취급하여야 함을 역설한다.

<주8> 다인(茶人)이라는 것은 차를 즐기는 사람이라던지 차와 생활만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나중에 사용되기 시작한 말이지만 [야마노우에소우지끼(山上宗二記)]에 따르면 무로마치말경에는 [차노유샤(茶湯者)], [스끼샤(數寄者)], [와비스키(寂數寄)]의 세가지 호칭이 있었는데 와비스키란 제대로된 명물의 다도구라고는 한점도 지니지 않고 [가슴의 각오가 하나, 예의작법이 하나, 재주가 하나]라는 세개의 조건을 구비한 사람을 지칭하였다. 이것을 보더라도 도구에 앞서 다인의 조건중에서도 정신성을 먼저 중요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간에 쥬코우가 말하는 다선일미의 경지속에는 통상적인 차의 예법과 동작속에서도 일본 선종의 불법과 상통하는 것이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차의 앞에서는 누구도 평등하다는 쥬코우가 서원의 차를 벗어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쥬코우는 선의 가르침을 내포한 차에 [와비]라는 개념의 미학을 추구한 것이다.
  앞서 설명한 바 있듯이 그는 독자적인 차석을 만들고 차회에 있어 정신성의 중요함을 설파한다. 그리고 차석에는 적은 인원의 손님을 초청하고, 마음을 담아 스스로 대접할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카라모노의 명물을 소지함과 동시에 일본의 것 중에서도 다기로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선별하는데 힘을 쏟았다. 확실한 것은 모르지만 쥬코우가 당시의 끽다의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대부분의 센케류 중심의 저자들이 쓴 다도입문서에는 센노리큐가 카라모노중심에서 고려나 일본의 도구들로, 대나무를 이용하였고, 작은 다실을 창조하였다는 등의 사유를 들어 다성(茶聖)이라 칭송하고 있지만, 서원의 차가 유행하던 당시의 사정을 생각해 보면 쥬코우 쪽의 다법의 창작과 파격적인 개조는 이후 다도를 집대성하였다고 하는 리큐보다 훨씬 더 강도가 큰 것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후에 상술하겠지만, 센노리큐가 다도의 체계를 일원화 할 수 있었던 데는 쥬코우에서 창시된 와비차가 다케노죠오우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가 때마침 오다노부나가와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마무리하며 천하통일의 시대를 이룩하게 되자 바로 그 최고권력자에 가까이 위치함에 따라 천하제일의 종장이라는 칭호를 받게 됨으로써 행사 가능하게 된 물리적인 힘이 다도계에 영향을 준 것을 감안할 경우에는 센노리큐의 일본 다도상의 업적은 오히려 과장된 면이 적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여하튼 간에 이러한 쥬코우의 이상도 그의 죽음과 연이은 전란으로 인하여 점차 희박하게 된다.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풍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교토의 땅을 벗어나 살기좋은 토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당시 안주가 가능한 지역은 무역항이기도 했던 사카이(堺)였던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와비차의 창시자 무라타쥬코우이후 일본의 전란기하에서 센노리큐의 등장이전까지의 와비차의 발전과정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겠다. 이 부분은 센노리큐로 이어지는 일본 다도사의 나침반이자 연결고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본고는 2003년 5월호(월간 다도)지에 연재한 내용입니다.

일본다도문화사 제5회 신흥도시 사카이(堺)와 와비차의 발전

■ 와비차의 발전과 사카이의 다인들
 와비차의 창시자 무라타쥬코우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그의 뒤를 이은 것은 무라타소우쥬우(村田宗珠)였다. 쥬코우의 상속자인 소우쥬우는 다다미4개반(四疊半)이나 6개(六疊間)의 작은 방(小座敷)을 이용한 시모쿄우차노유(下京茶湯)1)를 확대시켰다.  서원의 작은 방을 발전시킨 형태의 이른바 초암풍(草庵風)의 차노유가 출현함으로써 복잡한 [도시안의 산거(山居)]라는 풍류적인 차노유가 고안 발전된 것이다. 하지만 교토의 차노유는 역시 연이은 전란 등으로 인해 더 이상 확대 발전하지는 못하고 만다.
주) 시모쿄우차노유라는 것은 오우닌분메이(應仁文明)의 전란 이후, 교토의 재건이 진행되던 가운데 교토성(京都城)의 상업지구에서 살던 상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차노유라 할 수 있다.

 차노유는 당시에 번영을 구가하던 신흥도시인 사카이(堺)에도 전해져 성행하게 된다. 사카이는 간고우센(勘合船)의 발착항구이자, 부호상인들로 구성된 에고우슈우(會合衆)라 불리던 36명의 유지들에 의한 자치가 이루어지는 도시였다.2)  대륙과의 무역에 의해 많은 다도구가 수입되는 한편, 교토에서 피난해온 무로마치바쿠후의 예능인(同朋衆 등)들에 의해 히가시야마류(東山流)의 차스키(茶數寄; 차노유를 뜻하던 말)도 전해지게 된다. 이로인해 주로 교토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차노유는 쥬코우에 의해 와비차(侘茶)가 탄생함과 동시에 그 무게중심이 신흥 도시인 사카이로 옮아가게 되는 것이다. 대중국무역은 물론이고 잦은 전란으로 무기의 조달과 판매 다시말해 군수산업으로 인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사카이의 부호상인들은 새롭게 창안된 차노유인 와비차를 적극 수용함과 동시에 이를 자신들의 장사에도 크게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외국무역의 중심지였었기 때문에 쵸우슈우(町衆)라 불리는 주로 상인들로 구성된 마을유력자들은 수입된 진귀한 물건을 취사하고 선택하는 안목과 능력을 각자가 자연스럽게 구비하고 있었다. 차노유는 친목의 장이었음과 동시에 테이슈(亭主)가 생각한데로 차석을 만들고, 도구를 나열하는 것이 가능한 자유로운 모임이었다. 테이슈는 다회시의 연출에 연구를 거듭하고, 손님들도 매번 차회에 참가할때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발견하고자 하는 기대를 가지고 모이게 되었다.

주2) 원래는 장군가의 직할령이긴 하였지만 막부의 세력이 각종 전란으로 영향력이 많이 약해지자 마을의 유지인 상인들 중 부호상인들이 주축이 되어 마을을 대표하게 된 에고우슈우(會合衆)라 불리는 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일종의 자치도시로 변화된다. 오늘날의 일종의 경제특구인 셈이다.

  그때까지는 귀족들의 유희로서 자신들과 같은 일반대중에게는 크게 관련이 없었지만 이제 신분의 고하를 불문하는 새로운 개념의 차노유는 그들의 경제활동 쉽게 말해 돈벌이와 직결되는 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상인들의 도구에 대한 안목과 몸에 배인 상술은 절묘하게 혼합되면서 차노유는 사카이를 기점으로 전국 각지로 순식간에 확산되어 간다.
 텐붕(天文; 1532-1555)연간에는 차노유의 개최내용을 기록하는 차카이키(茶會記)도 출현하게 된다. 그만큼 차노유라 불리던 차회가 수없이 그리고 부호상인계층에서는 폭넓게 유행하였다는 것을 반증해 주기도 하는 것이다. 당시의 차회는 신분도 서로 다르고 초면인 사람들끼리도 서로 참가하여 교류하게 됨에 따라 차회의 순서나 찻자리(茶席)의 배치 등에도 나름대로 일정한 암묵적인 규칙이 생겨나게 된다. 또 차회기의 출현자체가 이러한 오늘날과 같은 차회(현재의 차지(茶事)라 불리는 형태)의 형식이 성립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차회에 모인 사람들이 일단 식사(會食)를 하고 잠시 물러났다가(中立;나까다치), 말차(박차(薄茶)와 농차(濃茶))를 마시는 등 일본다도에 있어 근간을 이루는 차회(茶會)의 흐름과 예법은 거의 형태적으로만 판단해 볼 경우 이때쯤에는 이미 일정한 형태를 가지면서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차노유는 유복한 마을 부호상인들에게 있어서는 교양과목이자 장사를 하는 입장에서도 필수과목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당시 차노유의 메카였다고도 할 수 있던 사카이는 극도로 번영하였던 무역항으로서 상인들의 노력에 따라 당시의 와비차의 정신과 일치하게 외국의 물품과 일본국내산의 물품을 조화롭게 차회에서 이용하고자 하였으나 역시 고가로 매매되는 외래산인 카라모노(唐物)가 압도적이었다. 아울러 현대에도 그러한 일단을 보이고 있듯이 부유한 마을 상인이나 영주계급의 무사들이 중심이 된 차노유였던 만큼 자연스럽게 고가의 명물들을 자랑하는 사치스런 분위기로 흘러가게 된다.

■ 다케노죠오우(武野紹鷗)의 와비차의 계승발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중의 일부계층에서는 그러한 풍조에 반발하거나 싫증내게 됨으로써 간소화된 차노유를 즐기고자 궁리하는 사람들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차노유에 있어서 귀천과 빈부를 초월한 하나의 풍류로 즐기고자 추구한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일본다도의 정신과 대부분의 다례형식의 기초를 세운 무라타쥬코우에 의해 시작된바 있던 이른바 와비차(侘茶)가 쥬코우의 문하제자들에 의해 가일층 심화 발전하게 된다. 그러한 흐름속에서 쥬코우의 와비의 다도정신을 더욱 계승 발전시킨 사람은 다께노죠우오우(武野紹鷗)였다. 그는 유복한 피혁상인(皮革商人)3)이었다. 다케노죠우오우에 의해 오늘날의 다도와 같은 용어로 사용되던 차스키(茶數寄)의 다례법에 대한 연구는 더욱 집약된다. 교토에 비하면 훨씬 협소한 지방도시라 할 수 있는 사카이였지만 [도시속의 은거생활]이라는 풍류를 즐기기 위해 죠우오우는 더욱 작은 방(다실)이나 로우지(露地)4) 등에 나름대로 자신의 새로운 취향을 더해간다. 
주3) 피혁은 당시 전란기의 필수품이던 갑옷의 필수 재료였던 만큼 일종의 군수산업물자에 해당하였던 품목이었다. 때문에 피혁상인은 여타 상인들 이상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이 손쉬웠고 또 그만큼 정경유착의 선두에 선 상인들이 많았다
주4) 일종의 정원이라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보다 상세한 것은 '일본의 다도문화(도서출판 리수, 근간)'의 제3부를 참조하기 바란다

 당시 다인들에 있어서 가도(歌道)와 선(禪)은 필수였다. 렌카시(連歌師; 시가를 읊는 전문인)들은 바로 이러한 자격요건에 딱 들어 맞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차노유를 주관하기 시작하였고 각 지방 영주들에게까지도 차노유를 소개하게 된다. 그러한 배경하에서 죠우오우도 교토로 상경하여 산죠니시사네다까(三條西實隆; 1455-1537)5)에게 노래(歌學)를 배우게 되고 또 선도 함께 배웠던 것이다. 차장(茶匠)들도 점차 렌카시(連歌師)들과 마찬가지로 [종장(宗匠)」대접을 받게 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결국 나중에는 이후 필연적으로 일본의 모든 예능이 다도속으로 집약됨에 따라 이 호칭은 오히려 차장들에게 독점되어 버리고 만다. 당시 가도(歌道)를 열심히 배우고 익히던 죠우오우는 와비차의 심경을 노래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주5) 무로마치 후기에서 전국시대에 걸쳐 활약하였던 학자로서 가도(歌道), 서도(書道)에 뛰어났으며 고전의 연구에도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도구없는 차] 바로 그것은 와비차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사카이라는 무역항의 특성 등에 따라 드디어 현재 일본에서 이도쟈왕(井戶茶碗)이라 불리는 조선의 다완이 일본의 다도 즉 차노유에 등장하기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결코 조선산의 다완이 값싼 저가 물품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도 또한 엄연한 외제요 고가의 수입품인 카라모노였기 때문에 채택6)되었다는 점이다. 
주6) 바꾸어 말하면 서원의 장식법으로서 넓은 방의 다이스에 장식하며 마시는 다례에는 천목다완과 천목대가 어울린다면 좁은 다다미방으로 꾸며진 다실내에서의 초암차의 풍류에는 조선산의 다완이 훨씬 더 어울렸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은 이러한 와비차의 다도구의 선별과 조합에 관해 언급한 쥬코우의 「조용하고 소박한(寂) 마방(馬屋)에 한필의 명마(名馬)를 세워둔 것 같은 것이 좋다」라는 말속에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명물다기를 많이 남긴 쥬코우의 감각에 미루어보더라도 이도다완은 명마에 비견된 것이지 결코 잡기로 본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 후의 리큐도 쥬코우의 도구의 활용법을 응용 발전시키는 선상에 있었기에 이도다완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현대 일본의 다도연구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조선의 잡기를 센노리큐의 고명한 안목으로 끄집어 내어 다기로 활용하였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하튼 죠오우는 쥬코우류(珠光流)의 와비차의 정신을 바탕으로 더욱 다례법을 간소하게 고쳐 나가면서 와비차를 완성단계까지 발전시키게 된다. 죠우오우의 다다미4개반의 다실은 일반 백성들의 초가집을 본뜬 검소한 것이었고, 다이스를 이용하여 점다하는 대신 이로리(圍爐裏)7)를 자그맣게 고쳐 궁핍함에 스스로 만족하며 차를 즐겼다. 
주7) 현재의 일본다도에서 사용하는 다다미방안에 설치된 화로와 유사한 일본 전통가옥의 조리용 화로라고 이해하면 된다.

  결국 죠오우가 추구한 차노유의 와비라는 것은 부족함에 만족하고 넘칠 정도로 풍족히 대접하지 않으며 진솔된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때문에 죠오우는 귀족취향의 서원의 차를 기피하고 초가지붕의 차실을 만들고, 값비싼 다기류를 가급적 피하며 당시에 흔히 사용하던 일상 생활용기중에서도 청수항아리(水指; 미즈사시)나 차통(茶入;차이레), 다완(茶碗; 챠왕) 등을 선별하여 다도구(茶道具)8)로 사용한 것이다. 이리하여 차노유는 그것을 수행하는 장소나 사용되는 도구보다는 먼저 마음가짐을 중요시하는 무게중심의 이동이 일어났는데 이때부터 비로서 일본의 다도정신이 체계화되기 시작하는 시점에 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8) 각종 다도구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면을 빌어 상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차회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모든 물건들을 차도구라 지칭한다고 이해하면 된다.

  나라(奈良)의 다인 마츠야히사마사(松屋久政; ?-1598)는 텐붕(天文) 11년(1542) 4월3일에 사카이에 와서 죠우오우의 차노유에 참석한 것을 그의 차회기인 [마츠야카이키(松屋會記)]에 특기하고 있다. 차회의 전날 밤 그의 숙소로 죠우오우가 사람을 보내, 차실의 도꼬노마(床間)9)에 장식할 경우 교쿠간(玉澗)10)의 파도화와 마츠지마(松嶋)의 차항아리(茶壺; 차쯔보)11)중 어느 것을 희망하는 가를 물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차회기를 기록한 히사마사가 알고있던 나라지방의 차회에서는 여러 명물들을 나열하여 감상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특별히 신기하고 감동적이었기에 기록하게 되었을 것이다. 

주9) 일본 다실에 설치된 장식용 공간이라 이해하면 된다.
주10) 중국 남송말기에서 원나라 초기까지 활동하였다고 전해지는 화승(畵僧)으로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주11) 여기의 차항아리는 비교적 큰 항아리로서 가루차를 담지 않고, 가루차의 직전형태인 덴챠라 불리는 찻잎의 줄기만을 제거한 순수한 잎부분만을 골라낸 것을 한지로 만든 봉투속에 일정량씩 담아둔 것을 모아 보관하다가 차회직전에 멧돌로 갈아 사용하는 용도로 보관하는 보관용기를 말한다.

 그 외에도 죠우오우는 차회의 도구로서 시가라키(信樂)나 비젠(備前) 등을 이용하였고 남반(南蠻)12)이나 고우라이(高麗; 조선을 뜻함)의 기물도 많이 채택하고 있다. 당시에 사용되던 일본국내산의 도자기들은 별로 귀히 여기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자칫 선택과 조합을 틀리게 하였을 경우 차좌석 전체의 품격과 분위기를 떨어트림에도 그는 엄밀하게 취사선택하였음을 보여준다.
주12) 당시 일본에서는 오끼나와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중국남부지역 등을 중국측에서 남쪽의 야만인 이라는 뜻으로 난만(南蠻)이라 표현하였었는데, 이러한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다. 

  다음호부터는 오다노부나가와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천하의 패권을 다투던 비교적 짧은 시기의 정치역학하에서의 센노리큐의 등장과 활동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일본다도문화사 제6회 - 월간 [다도]지 2003년 6월호에 연재한 내용임
                                                                        비봉   김진홍

■ 정치역학하에서의 차노유 시대-일본다도의 형성기
<<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와 차노유 >>
  무로마치바쿠후말의 전란기였음에도 일종의 자유무역항으로서 번창하던 사카이에서는 차노유가 부호상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하고 발전해 나간다. 한편으로는 이 시기의 새로운 무가세계의 강자로서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가 전면으로 급부상하여 천하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며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1570-1596)1)시대를 개막하게 된다.

주1) 일본의 문화사적인 시대구분에 독특한 특징을 지니는 이 시기는 오다노부나가의 아즈치(安土)성과 토요토미히데요시의 모모야마(桃山)성을 중심으로 천하가 움직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문화를 아즈치모모야마문화, 그리고 시대를 아즈치모모야마시대라 부르고 있다.

 노부나가는 천하통일의 패권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차노유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노부나가가 천하제패를 이룸에 있어서 옛 막부장군가의 직할령이었고 자치도시이자 국제적인 상업도시였던 사카이(堺)와 이를 운영해나가는 실질적인 주인이라 할 수 있던 부호상인들의 경제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가급적 전쟁이라는 극한적인 수단을 행사하지 않고 교토(京都)나 사카이를 자신의 지배하에 넣으려던 노부나가에게 있어서는 당시 차노유라는 사교모임의 존재는 어떤 형태의 목적에서건 이용하기에 아주 적합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차노유를 접한 노부나가는 이후에 「명물사냥」이라 불릴정도로 명물의 다도구(茶道具)를 반강제적으로 매수함으로써 자신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기도 하고 또 이렇게 수집 축적한 명물들을 각 무장들에게 하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복속관계를 다져나가는 등 차노유를 순수한 의미보다는 정략적인 매개체중 하나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천하통일을 이루어 나갈 때 이용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으로는 두 가지가 유명하다. 하나는 차노유였고, 또 하나는 현대에도 전통스포츠로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식 씨름인 스모(相樸)였다. 스모를 이용하게 된 배경으로서는 당시가 전란중이었으므로 무장이하의 군졸들에 대한 사기진작과 이벤트성 행사를 통해 새로이 용맹스런 무사를 선발하고자하는 등 복합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아마도 필자의 견해로는 차노유를 통해서는 귀족과 유력부호들을 회유하는 한편, 스모를 통해서는 전란에 지친 민중들의 동요를 잠재우고 하급천민들과도 함께 호흡하는 위정자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노부나가다운 고도의 전략과 그의 활달한 성격이 함께 작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급기야는 당시 사카이의 유명 다인이었던  이마이소큐(今井宗久)는 마츠시마차츠보(松嶋茶壺)와 죠우오우나스차이레(紹鷗茄子茶入)2)를, 야마토지방(大和國)의 영주(大名)인 마츠나가히사히데(松永久秀)는 츠쿠모나스차이레(付藻茄子茶入) 등 천하의 명물다기들을 노부나가에게 바침으로써 무조건 복종할 것이라는 뜻을 은연중에 나타내게 된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이 당시 상당히 고가를 호가하던 명물다기를 헌상함으로써 노부나가의 토벌대상으로부터 제외되었다고도 한다. 혹자는 이를 계기로 노부나가의 옛 장군가에서 소유하였던 명물3)들의 수집욕에 불이 붙었다고도 한다. 노부나가는 명물들을 단순히 수집하는데 만 그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카이의 최고 부호상인이었던 텐노지야(天王寺屋)를 소유하고 있던 소우큐(宗及), 어전에서의 다례법을 알고 있다고 알려지던 센노소우에키(千宗易)를 차회에 초청하기도 한다. 이 소우에키가 이후의 센노리큐(千利休)이다.

주2) 당시에는 현대의 다기분류법과 달리 차도구의 이전 소유자가 유명한 다인일 경우 명물로 취급되었다. 때문에 당시의 다기들에는 이전에 소유하였던 유명다인의 이름이 붙는 경우가 많았다. 죠오우나스차이레란 다케노죠오우가 소유하였던 가지형태의 도자기로 만든 가루차용기라는 뜻이다. 
주3) 이 아즈치모모야마시대에 등장하고 사용되었던 다기들에는 모두 대(大)자가 붙어 유명한 것이라는 명물중 대명물로 취급된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같은 시대의 이른바 이도챠왕(井戶茶碗)이라도 크기의 대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 시기에 등장한 것에는 대명물에 속하여 이름도 오오이도(大井戶)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당시의 사카이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기따무끼도우친(北向道陳), 쯔다소우다츠(津田宗達), 쯔다소큐우(津田宗及), 이마이소유큐우(今井宗久) 등이 유명다인으로 알려져있었다. 이렇게사카이에서 와비차가 점차 체계를 이루면서 다인별로 그 취향에 따라 다례가 정형화 되어가던 시기에 노부나가가 등장한 것이다. 사카이의 이들 부호상인 겸 다인들 중에서 가장 빨리 노부나가에게 가까이 접근하게 된 인물은 이마이소우큐(今井宗久;1520-1593)였다. 그는 노부나가가 천하평정을 이룸에 있어 무기의 조달부터 시작하여 재정면에서 큰 힘을 쏟았고, 당시 차노유샤(茶湯者)4)로서도 노부나가에게 소큐우(宗及)나 소우에키(宗易)를 소개시킬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그는 일본 와비차의 창시자인 무라타쥬코우의 제자인 다케노죠우오우의 사위인데다 죠오우가 소지하였던 명물다기들도 입수하는 한편, 죠오우의 후계자로서 당시의 와비차의 정통을 이은 차노유의 제일인자로 일본다도사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주4) 다인을 의미하였던 당시의 용어중 하나이다

 하지만, 천하통일을 이루는 데만 애를 써왔던 노부나가의 정권은 그의 죽음과 함께 토요토미히데요시에게 곧바로 인수되고 만다. 그리고 그때부터 소우큐 대신 소우에키가 중용됨으로써 일본다도사의 흐름은 센노소우에키를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등장과 센노리큐(千利休)의 활약 >>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서 정치, 경제와 더욱 밀접한 유착관계를 가지게 된 차노유는 그의 뒤를 이은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더욱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된다. 지금까지 주로 사카이(堺)나 교토(京都), 나라(奈良) 등지에서 일부 부호상인이나 각 지방영주(大名)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던 차노유가 새롭게 전국제패를 이룩한 통일정권의 출현으로 인하여 전국으로 파급되고 시대적 교양인의 한 문화로서 인식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 자신도 차노유에 심취하여 정진함과 동시에 다양한 차노유의 활동을 전개한 것도 차노유 보급의 전국확대를 부채질한 큰 원인중의 하나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물론 당시 히데요시가 차노유의 활동을 해 나가는데 있어 후견인의 역할을 하며 지탱해준 다인들로서는 센노소우에키(千宗易), 츠다소오큐(津田宗及), 이마이소쿠우(今井宗久) 등이 있었다.
 일본 전국시대의 풍운아로 표현되는 오다노부나가의 사망 직후 소우에키(宗易)는 다이토쿠사(大德寺)의 고케이소우친(古溪宗陳;1532-1597)에게 재빨리 부탁하여 노부나가의 100일기법회(百日忌法要)를 성공리에 마치게 된다. 그는 이를 계기로 이후 소우친과 함께 히데요시(秀吉)에게 다가가게 된다. 아울러 히데요시측에서도 자치도시인 사카이의 부호상인층이나 종교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린자이슈(臨濟宗)의 다이토구사(大德寺) 등 이른바 구가이샤(公界者; <보론: 센노리큐활동시기의 정치적배경>을 참조)라 부르던 계층들을 장악하고 싶어하던 참이었다. 당시 다이토구사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소우에키는 덴노우지야(天王寺屋)를 운영하던 부호상인이자 다인이던 쯔다소오큐(津田宗及;?-1591)를 다음자리로 제치고 드디어 히데요시의 수석 다도사범인 사토우(茶頭)5)가 된다. 소우에키는 이즈음에 차노유와 다도구의 중간매매역을 맡게 되면서 형성된 인맥들을 통하여 각 지방영주들과 히데요시와의 정치적인 외교까지도 은연중에 가담하게 됨으로써 그는 히데요시 초기정권의 최측근으로서 무게감을 더해가게 된다. 당시 갑작스럽게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 히데요시가 은연중 전통무가 출신이 아닌 밑바닥부터 출세하였다는 핸디캡이 있었던 만큼 쉽사리 주변의 정통무가 관료식 정치보다는 어쩔 수 없이 믿을 수 있는 자들로 그때마다 현안사항을 해결해 나가는 일종의 측근정치를 할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주5) 당시에는 사토우(茶道)라는 말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차인이라는 뜻과 차노유의 실력자라는 뜻으로 사토우(茶頭)나 사토우(茶堂)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후 사토우(茶道)는 이러한 음들을 딴 것으로 다도(茶道)는 챠도우(茶道)라 불러야 올바르다는 주장을 하는 일본의 학자도 있다.

 다음호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히데요시와의 밀착관계를 통한 다도계의 제일인자의 자리를 굳혀나갔던 센노리큐의 활동을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하겠다.

<<보론>> 센노리큐 활동시기의 정치적 배경
 중세 일본의 봉건영주시대에 있어서 무가(武家)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사유지인 관할영토를 지배하기만 하였을 뿐 완전배타적인 통치권까지도 자체적으로 보유한 적은 없었다. 기본적인 방식은 자신의 소속령이 사적 소유지에 대한 관할권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무가의 영주권자체가 지리적인 관할령내의 모든 공공의 부문까지 포괄한 정치적 통치권을 의미하는 경우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자신의 관할지인 자신의 영토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공공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던 존재에 해당하던 세계에 속하거나 종사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구가이(公界)나 무엔(無緣), 라쿠(樂) 등으로 불리던 사람들은 이들 무가영주의 사적 소유권에는 속하지 않음에 따라 이들은 은연중 나름대로의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公界·無緣·樂)의 구성은 매우 다양하였는데, 주로 교역을 생업으로 하는 자들로서 일정한 소속령이 없이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한 성격의 예능민(당연히 연가사(連歌師)나 차장(茶匠)까지 포함)이나 각 마을의 유지(소우에키 등과 같은 자치권을 가진 부호상인들)들이 이에 속해 있었다. 아울러, 직접 신불(神佛) 내지는 덴노우(天皇)에 소속되어 있다고 여겨지던 지닝(神人; 신사에서 종사하는 자) 등과 함께 역시 직접적으로 신불에 속하면서 천황가나 무가들로부터 귀의를 받는 등 이들과 직접적이고도 강력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권력있는 종교가(특히 임제종 대덕사와 같은 선율종계통의)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에서도 종교가 특히 선율종의 승들은 공공성 다시 말해 그들의 중립적 위치라는 성격으로 인하여 각 지방국들간의 외교관역할을 담당하는 적도 많았다. 물론 이들 구가이에 속하는 예능인들도 원리적으로는 같은 개념이었다. 이와같은 시대적 상황하에서 차노유는 당초부터 정치권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명실상부한 천하제패라는 정치적 구도의 변화에 따라서 지금까지 별격의 존재로 여겨져 왔던 구가이(公界)도 원칙적으로는 각 지방영주들의 지배권 다시말해 통치권의 대상에 포함되는 존재로 취급되기 시작한다. 당초 노부나가나 히데요시가 이들을 회유하거나 복속시키기 위하여 차노유를 통한 협조 내지는 공조체제를 유지할 필요성을 느꼈었지만 무가 지배권의 정립과 전국을 일사불란하게 통치하는 정치구조하에서는 이들 마을유지나 종교가와의 협력정치 내지는 협력통치가 불필요하였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존재로까지 상황이 급변해 버리고 만것이다. 이러한 정치구도의 변화는 그 이후 별격의 존재로 취급받아 왔던 이들의 존재는 그 계층 자체의 경제성이나 사회성으로만 대접하게 되었고 그들 자신의 힘으로 사회적인 위치를 인정받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때 정치권력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버린다. 이 시대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후의 일이기는 하나 어쩌면 센노리큐가 억울한 누명을 쓴 채 희생양이 되었다는 해석도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이고 또 그러한 해석을 내리고 싶어 하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센노리큐의 죽음을 둘러싼 상세한 부분은 다음호 이후에 별도로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월간 다도 7월호에 연재한 내용을 게재합니다. - 비봉 -

일본다도문화사 제7회 ■ 정치역학하에서의 차노유 시대-일본다도의 형성기 2

<< 히데요시와 센노리큐(千利休)의 차노유 >>

 무로마치바쿠후의 몰락과 함께 태동했던 각 지방영주간의 군웅할거시대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오다노부나가에 의해 종식된 후, 곧바로 노부나가의 뒤를 잇게 된 히데요시는 그의 정치적입지가 확립되기까지 필연적으로 측근정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크게 나누어 정권의 유지확립은 정통 무가계급들로 구성된 가신그룹과 정치자금이나 무기조달에 있어 유력자들이었던 상인계급의 다인그룹이라는 이분법으로 압축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정치적인 문제의 공적인 최측근의 자리는 히데요시의 이복동생인 토요토미히데나가(豊臣秀長)가 맡게 되었고, 차노유(茶湯)를 정치적인 완충지대로서 자연스럽게 이용하며 사적인 청탁과 같은 은밀한 루트의 중개역으로는 센노소우에키(千宗易)가 전담하게 된 셈이다. 당시 히데요시의 동생인 히데나가와 소우에키와의 인간적인 교류는 매우 두텁고 친밀하였던 관계상 히데요시가 소우에키를 더욱 중시하게 되었고 또 그와의 밀접한 관계유지는 당시 일반 소국의 영주들간에 인식된 소우에키라는 인물이 단순한 차노유의 사범 이상의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비추어 졌음은 물론이며 그 또한 사실이었다.

주:1)차노유는 다탕(茶湯)이라는 한자어를 일본어로 읽은 것으로서 간혹 차를 우려낸 마시는 것으로서의 다탕이라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곳에서는 차를 준비하고 마시는 전과정이라는 의미(다도라는 말과 동일)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다. 일본의 다인중에는 차노유라는 용어가 순수 일본식 개념이라 여기며 즐겨 사용하는 자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세종실록>에도 행다의 개념을 표현하는 용어중 하나로 다탕(茶湯)이라는 한자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다도사범이 된 이후 히데요시가 점차 차노유에 심취하게 됨에 따라 소우에키는 히데요시가 작은방의 다실을 축조한다거나 그의 성에서 개최하는 각종 다회에도 늘 참석하며 간여하게 된다.
 그러던 중에 센노소우에키는 텐쇼우(天正) 13년(1585) 히데요시와 함께 궁중다회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당시의 오오기마치천황(正親町天皇)으로부터 「리큐고지(利休居士)」의 칭호를 하사받기에 이른다. 드디어, 그는 일본국내의 명실상부한 차노유의 제일인자로서의 리큐(天下第一宗匠利休)라는 확고부동한 위치를 확보하면서 그의 인생에 있어 최고의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이후 그는 그 당시 종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선배 다인들이 정립해 두었던 차노유의 예법들로부터 비로소 구속받지 않아도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독립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양하게 유포되어 있던 각종 다례법을 통일하는 한편, 서서히 소우에키라는 이름대신 하사받은 자랑스런 칭호인 리큐라는 이름을 당당하게 사용하기 시작한다.
 뿐만아니라 그동안 쌓아왔던 히데요시와의 관계, 차노유의 제일인자라 자타가 공인할 수 있는 천황으로부터의 칭호하사 등이 서로 맞물리면서 실질적인 정치적 파워를 수반한 리큐의 권위는 어지간한 지방영주인 다이묘(大名)들보다 우위에 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덴쇼우(天正) 14년(1586년) 4월에 후고(豊後)의 다이묘인 오오토모소우린(大友宗麟)이 히데요시를 알현하였을 때의 감상을 그의 가신장로(家老)앞으로 보낸 편지중에 쓴 [(중략) 내밀한 사적인 의논은 소우에키에게, 공적인 의논은 히데나가에게(중략)]라는 말과 [소우에키가 아니고서는 간빠구(關伯; 히데요시를 뜻함)님에게 한마디라도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중략)]라는 말은 매우 유명하다. 그 당시의 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측근정치의 폐단이란 지배자에게 직언할 수 있는 통로가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만큼 리큐는 각 다이묘와 히데요시간의 중간위치에서 차노유를 통해 지방국가들간의 분쟁조정까지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텐쇼우 15년(1587) 히데요시는 그때까지 새로운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던 큐슈의 사츠마에 출정하여 영주 시마즈(島津)를 복속시킨다. 그리고 동년 10월 1일 기타노텐만큐우(北野天滿宮)의 경내에서 후세에 기타노다이챠카이(北野大茶會)라 부르는 대규모의 차모임을 개최한다. 이 다회는 자신이 사용할 다완(茶碗)하나만을 달랑 지닌 채 참석한 자를 위시하여 각 지방에서 차장(茶匠; 차노유의 명인)이라 불리던 자들까지 포괄한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고, 서로간의 차노유의 기법을 경쟁하는 일본 다도문화사상 가장 기록할 만한 다회중의 하나였다.
 이 다회의 특징이라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차노유에 마음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도록 한 점. 둘째, 차석의 크기를 다다미 2개 크기로 아주 작게 만든 점. 마지막으로 히데요시도 직접 점다를 하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대부분의 다도구를 장식하고 공개한 점이다. 개최 당일은 1000개 이상의 다실이 만들어졌고 히데요시는 주최석에 황금의 조립식 차석을 중앙에 설치한 후 양 쪽에는 다다미3개 크기의 차석을 만든 다음 히데요시와 리큐, 소큐우 등이 접대를 맡았다. 실로 그 규모의 웅장함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 대차회는 원래 십일동안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다른 사건이 생기는 바람에 아쉽게도 하루만에 끝이 나고 만다. 하지만, 이 대차회에는 몇가지 주목할 만한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이 대차회때 명물도구2)라는 것은 단 한점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뜻하는 [고쿠와비차(極寂茶)]3)를 지향하던 가쇼우(化生)나 헤치칸(ノ貫)과 같은 다인들의 취향이 히데요시를 크게 흡족시킴으로써 두 사람모두 히데요시로부터 포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사건이 시사하는 점은 매우 크다. 그동안 현대 일본의 각종 다도입문서나 해설서에는 히데요시가 「황금의 다실」이라는 황금주의의 취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리큐가 지향하던 와비차의 감성과 자주 대립하였다고 하는 설이 지배적이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와전되고 확대 해석된 측면이 없지 않다. 실상은 히데요시가 자신이 거주하는 오오사카성(大阪城)내에 초암(草庵)의 다실을 지으면서까지 와비차를 추구하였었고, 더구나 당시의 리큐를 포함한 부호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명물다도구와 가격적인 측면에서 비교한다 하더라도 황금의 다도구란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싸구려에 불과했다. 물론 현대의 일본에서도 금으로 만든 다기들의 가격보다는 골동다기가 훨씬 더 고가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당시 이 다회에서 히데요시가 이러한 고쿠와비차를 지향하던 다인들을 포상하고 칭찬한데는 와비차라고 하면서도 오히려 고가의 명물다도구만을 고집하는 리큐 등 소위 다도명인들이라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도전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참고로, 일본내에 순수 다도연구자들 중에는 이러한 필자의 해석과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2)명물도구란 당시 명물(名物)로 분류되던 차도구를 뜻한다. 가마쿠라나 무로마치시대부터 장군가에서 소장하였던 우리나라(고려)나 중국(송,명)으로부터의 수입품을 중심으로한 차도구는 대명물(大名物)로 그이후 리큐활동기의 각 유명 차장이나 선배다인들이 보유하였던 것으로 유명해진 차도구는 보유자의 이름이 붙은 ○○차이레, ××차츠보 등과 같이 거래되었고 이러한 것들은 명물도구로서 취급되었었다. 그만큼 고가로 거래되던 것들이다.

주:3)고쿠와비차는 무라타쥬코우가 제창한 와비차의 근검절약정신과 다례법을 초지일관하여 당시의 대부분의 다인들이 소지하고 있던 명물이라 불리는 이른바 명물다도구조차도 가지지 않고 초암의 차에 매진하던 다인들의 다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여하튼, 이 다회를 기점으로 히데요시는 그동안 차노유를 통해 교류하여 오던 사카이의 유지들 보다 가미야소우탄(神谷宗湛) 등을 대표로 하는 또 다른 무역항이라 할 수 있던 하카다(博多)의 유지들과 가까이 지내기 시작한다. 텐쇼우 18년(1590), 히데요시는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죠우(北條)씨까지도 복속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전국평정을 이룩하게 된다. 물론 이때에도 리큐는 오다와라의 싸움터까지 히데요시를 따라가서 대나무의 하나이레(花入; 일본다도의 화병)를 만들기도 하지만 히데요시보다 앞서 홀로 교토로 돌아오고 만다. 
 이와 시기를 같이 하면서 히데요시의 측근 다인중 이마이소큐우(今井宗久)가 물러나고, 츠다소오큐(津田宗及)도 은거에 들어가는 한편 히데요시와 사카이의 유지들로 구성된 차장(茶匠)들간의 관계는 계속 변화된다. 이미 사카이는 히데요시에게 완전히 장악된데다 상업의 중심지도 오오사카(大阪)로 옮겨진 상태였고 조선침략을 위하여 하카다의 호상이자 차장(茶匠)인 시마이소우시츠(島井宗室)나 앞서 언급한 가미야소우탄 등을 대신 중용하기 시작하면서 종교계를 대표하던 다이토쿠사(大德寺)도 히데요시정권으로부터 점차 소외되기 시작한다.
 다음해인 텐쇼우 19년(1591) 2월에는 급기야 나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의 정치적 권력을 지녔던 센노리큐조차도 히데요시로부터 두 개의 죄목으로 셋부쿠(切復)4)를 명받아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죄목중 하나는 부정한 방법으로 다도구를 매매하여 사욕을 채웠다는 것, 또 하나는 다이토쿠사의 산문위에 자신의 목상을 만들어 올렸다는 불경죄였다.

주:4) 당시 무사계급사회에서는 우리나라의 사약과 같은 형태로 최고권력자가 가신에게 죽음을 내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배를 칼로 잘라 스스로 자살토록 하였는데 그것을 셋부쿠라고 한다

 리큐의 사후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히데요시도 전란중이던 게이쵸우(慶長) 3년(1598) 4월  역사속의 인물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가신그룹과 동쪽 에도(江戶; 지금의 도꾜)지방에 자리잡고 호시탐탐 천하의 패권을 노리던 토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의 가신그룹간에 천하 패권을 놓고 격돌한 세키가하라(關が原)의 전투(1600년)에서 승리한 토쿠가와의 에도바쿠후시대(江戶幕府時代; 1600-1867)가 개막된다.
 이 시기는 히데요시의 정권도 무가권력의 정치제도로 확실하게 기반을 확립하고 있었고 밀접했던 정치와 종교도 분리되기 시작하였던 때였다. 아울러 다인들과 종교가를 중심으로 하던 측근정치도 무가중심의 정치체제로 넘어가고 있었다. 굳이 표현한다면 정치와 다도의 은밀한 관계이자 정경유착이 단절되었던 것이다. 당연한 순서이겠으나 이러한 히데요시 정권말기의 경향은 에도바쿠후시대에 더욱 확립되는 방향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것은 순수한 의미에서 일본의 다도문화가 정립될 수 있는 정치사회적 토양이 뿌리내리게 된 것이며 일본다도사의 흐름에 일대 전기가 마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다음호부터는 센노리큐에 대하여 좀더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월간 [다도]지에 연재해온 내용은 일본다도문화사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이었다. 그 전후반을 구분하는시기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센노리큐에 대한 재조명을 삼회에 걸쳐 연재한다.-비봉-


일본다도문화사 제8회
■ 보론(補論) - 센노리큐(千利休)
 일본의 다도문화사를 시기별로 구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를 크게 나누어 전기와 후기로 구분할 경우, 지난 호까지 독자여러분들과 함께 한 부분이 대체로 전기에 해당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1600년을 기준연대로 하여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는 데 이 시기는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있어서 모두 큰 전환점을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다노부나가에 의해 시작된 춘추전국시대가 토요토미히데요시를 거쳐 이 해에 천하의 패권을 놓고 벌인 세끼가하라의 대전투에서 승리한 동쪽진영의 도쿠가와이에야스에 의해 에도바쿠후시대가 개막됨으로써 안정을 되찾게 된다. 아울러, 경제분야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각 지방 영주들에게 끌려간 조선의 선진기술집단들에 의해 개척 발아된 도자, 염직, 인쇄 등 당시로서는 첨단산업기술이 각 지역의 특수산업으로 발전하면서 경제적 부를 축적시키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한다. 다만, 다른 분야가 안정화되고 발전일로에 선 것과는 달리 이 시기의 일본의 다도계는 이 해를 기점으로 오히려 춘추전국시대로 전환되는 듯한 현상을 보이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센노리큐에 의해 어느 정도 다례법이 정비되고 통일되는 듯하다가 그가 죽음으로써 벌어지게 된 현상이라 보다는, 새로운 바쿠후의 개막이라는 정치적 대변화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도계의 분열, 발전과정은 에도바쿠후시대의 문화적 황금기라 불리는 17세기말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외형적인 모습의 틀을 갖추면서 현대 일본의 다도 특히 말차도의 모습으로 정형화됨으로써 일본다도의 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문화사조이건 결과가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과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일본이 명치유신이후부터 부국강병이라는 군국주의하에서 치룬 세계제2차대전의 패전에 이르기까지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다도문화가 한국전쟁을 기화로 이룩한 50-60년대의 고속성장을 밑거름으로 급성장한 것은 마치 16세기말의 현상과 너무나 비슷하다.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한강의 기적이라 불렸던 경제발전이 없었어도 현재와 같이 다도문화가 양적 질적으로 팽창할 수 있었을까 확신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근대화과정에서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친 일제 36년이라는 강점기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방면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며 결과적으로 말해 문화계도 예외일수는 없었다. 그러한 논지하에 다도계라고 하여 일본의 왜색이라 불리는 다도문화가 100%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다만, 다른 분야보다는 뜻 있는 많은 문화인들의 노력과 연구의 결과로 오히려 타 분야에 비해 왜색문화를 타파하고 정통과 전통성을 지키고 보존하며 복원하고자 하는 노력은 괄목할만하다 할 것이며, 다도계 또한 그 선봉에 서있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다만,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의 올바른의 문화에서의 일본의 다도문화의 영향이 비록 퇴치되거나 구분되고 있다는 것은 모르겠으나 일본 자체의 다도문화사에서 객관적으로 평가되어야할 많은 부분중 국내 연구가의 부족으로 대부분이 일본내의 다도관련 서적(특히 메이저급의 다도관련 출판사인 담교사 등을 중심으로하는)을 통해 여과없이 전해지고 있는 일본다도사의 한 단면에서 등장하는 센노리큐는 상당한 부분이 미화되고 각색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음은 뜻있는 일본내 연구자라면 공감하는바 적지 않다 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특별히 센노리큐에 대한 부분을 별도로 다루고 싶었다. 이번호부터 3회에 걸쳐 센노리큐를 둘러싼 논쟁부분을 중심으로 좀더 상세하게 다루어보고자 하였다.
센노리큐에 대한 전문연구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본의 다도문화라는 필자의 저술속에서 한 측면을 보는 것인 만큼 두서없는 전개가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그 점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센노리큐(千利休)는 본래는 성(姓)이 다나카(田中)이고 이름은 요지로우(與四郞)로서 1522년 사카이(堺)에서 출생하였다. 일설에는 아시카가장군가의 도보슈우(同朋衆)였던 조부 센아미(千阿 )의 성을 따서 이후에 센(千)이라는 성을 채택하였다고도 하고 오다노부나가로부터 이 성을 하사받았다고도 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7세가 된 때에 다나까요지로우는 당시 차의 명인으로 알려지던 에키안(易庵)의 기따무끼도우친(北向道陳;1504-1562)에게 차노유를 사사받게 된다. 도우친은 다이스(臺子)의 다례법을 소아미(相阿彌)에게 배웠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요지로우는 최초의 다도를 먼저 히가시야마류(東山流)의 차스키(茶數寄)를 익히게 된 셈이다. 이후 도우친의 소개로 당시 사카이(堺)로 돌아와 있던 와비차의 대가였던 다케노죠오우(武野紹鷗)의 문하에 제자로서 입문하게 된다. 요지로우는 첫 번째 다도스승이라 할 수 있는 도우친의 암자의 이름인 에키안(易庵)으로부터 에키(易)를 따서 소우에키(宗易)라 개명하게 되고 죠오우나 도우친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쥬코우에서 죠오우를 거쳐 자신이 맥을 잇는 와비차(侘茶)의 정통(正統)임을 표방하며 더욱 와비차에 정진한다. 죠오우가 사망한 이후, 사카이에서는 부호상인이던 노우야(納屋)의 이마이소우큐우(今井宗久;1520-1593)나 텐노우지야(天王寺屋)의 츠다소우다츠(津田宗達;1504-1566) 등이 차노유의 종장으로 활약중이었다. 이들과 비교하면 겨우 중견 상인에 불과하였던 소우에키는 아시카가쇼우군(足利將軍)을 모셨던 쥬코우를 흉내내어 궁전에서의 다례법인 덴츄우차노유(殿中茶湯)를 연구하는 한편 린자이슈 다이토쿠사(臨濟宗 大德寺)의 한 지파인 난소우사(南宗寺)의 다이린소우토우(大林宗套)의 뒤를 계승한 쇼우레이소우킨(笑嶺宗 ), 슌노쿠소우엔(春屋宗園), 고케이소우친(古溪宗陳;18532-1597) 등으로부터는 참선을 배우기도 한다.

주: 1) 기따무끼도우친(北向道陳)은 일본 무로마치바쿠후의 말기경에 활동했던 다인중의 한사람이다. 무라타쥬코우의 와비차를 계승발전시킨 다케노죠오와 친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며, 색다르게 북향의 집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라 붙여진 명명이며 당시 기따무끼란 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 통설이다.
   2) 이마이소큐는 모모야마시대에 활동했던 다인으로서 사카이시의 호상이었다. 차노유를 다케노죠오우로부터 배워 이후 그의 사위가 됨으로써 이후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차사범을 맡게된다. 전설적인 명물들을 많이 소지하였던 것으로 알려지며, 노부나가가 천하의 패권을 잡고 교토에 입성하였을 때 재빨리 죠오우가 소지하였던 마츠지마의 차츠보를 헌상함으로써 노부나가에 저항하던 사카이의 상계가 노부나가측에 협조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공로로 이후 정계에 밀접한 다인이자 상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3) 츠다소우다츠는 무로마치말기의 다인으로, 역시 사카이출신의 호상이다. 다케노죠오우로부터 차노유를 배웠고, 많은 명물을 소지하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가 기록한 차회기는 1548-1566년간의 일본 다도문화사상 급변하던 시기의 것으로 매우 귀중한 사료로 취급된다.
   4) 다이토쿠사의 제111대 주지를 역임하며 센노리큐와의 친교가 두터웠던 선승이다. 그의 참선의 제자로는 센노리큐외에도 이마이소우큐우(今井宗久), 후루타오리베(古田織部)가 있다.

 소우에키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이른바 사쿠이(作意)에 뛰어나, 다다미 4개반 이하의 작은 방의 다실(茶室)이나 물레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빚은 라쿠다완(樂燒)의 채용, 대나무를 잘라내어 후타오끼(蓋置)로 만드는 등 다양한 자신만의 「기호물」을 창조하였다고 알려지지만, 작은 다실이나 대나무로 만든 후타오끼에 대해서는 이미 선대(무라타쥬코우와 다케노죠오우)에 발명되어 시도되고 있던 것을 더욱 즐겨 사용하였다고 하는 것이 좀더 정확한 평가 일 것이다.

주: 5) 여기서의 후타오끼 즉 개치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현대 다회에서 다관의 뚜껑을 여닫을 때 임시로 놓기 위한 뚜껑받침이 아니다. 일본 말차도의 후타오끼는 전통적인 다실의 바닥자체가 다다미방인 관계로 겨울용의 다회에서 사용하는 로(爐)나 여름의 후우로(風爐) 모두 열탕을 끓이는 솥 즉 가마(釜)는 금속제의 것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 가마의 뚜껑도 금속제이기 때문에 열탕을 끓이는 가운데 고열로 된 금속제의 뚜껑은 다완에 열탕을 붓거나 냉수를 첨가하는 동안에는 바로 이 후타오끼에 놓아두게 된다. 최초에는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금속제의 것을 사용하다가 점차 대나무제나 도자기로 만든 것을 사용하게 된다.

 스승인 죠오우의 은둔적인 취향과 비교해 그는 단지 배운 것을 익히는데 만족하지 않고 이를 토대로 더욱 한 단계 계승 발전시키려는 노력과 이를 세상에 공개하려 한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그것은 쥬코우를 근원으로 하는 초암(草庵)의 와비차(侘茶)의 계승이며, 또한 그것을 기조로 하여 다이스(臺子)를 이용하는 서원차(書院茶湯)로부터 초암의 와비차에 무게가 놓여있는 스키(數寄)의 세계까지 포괄하는 이른바 신교소(眞, 行, 草)의 구분에 의한 차노유의 체제정립이었다. 소우에키의 다풍(茶風)을 요약하여 「움직임은 적고 점다법은 가볍게」라 평가하지만 차노유의 풍류화는 소우에키에 의해 어느 정도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다도사에 등장하는 많은 명품의 다기(茶器)중에서도 뛰어난 것은 모두 리큐가 즐겼던 기호물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리큐의 차노유를 통한 심미안이나 그가 발휘한 예술성있는 취향은 차노유 뿐 만 아니라 그 후 일본의 모든 예술분야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도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일본의 모든 예술공예품 그 중에서도 특히 도자기의 최고급의 위치는 모두 다기류가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한다. 뿐 만 아니라 그로 인해 일본에서는 다기로 이용하기 위해 동남아시아 등지로부터 최고급의 도자기들이 수입되고 보존됨으로써 동남아시아 지역산 도자기중 최고의 명품들은 모두 일본에 모여지게 되었다고 하는 긍정적 평가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지는 객관적 시각에서 다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우선 리큐를 의도적으로 깍아 내리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를 일체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는 것을 분명히 사전에 밝혀둔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이러한 제반 긍정적인 시각의 기본적 틀은 당연히 센노리큐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산센케(三千家)를 중심으로 한 말차도유파가 직접 경영하는 출판사 등의 출판물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리큐에 대한 역사속의 부정적 견해나 리큐의 활동 분야를 일본 다도사전체를 놓고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각에서 비교적 주관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많다는 점은 특히 우리들의 입장에서 양국의 다도를 비교함에 있어서는 편향적인 해석만을 가지고서는 힘들뿐더러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다. 

 주: 6) 산센케란 센노리큐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일본 말차도의 유파중 우리나라에 비교적 많이알려진 우라센케(裏千家)외에 오모테센케(表千家), 부샤고로센케(武者小路千家)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다.

  우선, 다기중에서도 뛰어난 것이 모두 리큐의 취향이라거나 그의 심미안 등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에 대한 것은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귀족적인 서원차 일색이던 시대에 와비차의 모태를 만든 무라타쥬코우의 혁신적이고도 파격적인 미적감각에 대한 다도구의 전환시도가 먼저 있었음을 감안해보면 모두 리큐의 취향에 의해 새로 등장하였다기 보다는 리큐의 기호나 취향속에는 와비차의 정신이 들어있고, 그 와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무라타쥬코우와 다께노죠오우를 거치며 대부분이 완성된 상태였던 미학이 내재되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로, 흔히 일본 특히 다도계나 고미술업계에서는 도자기를 평가하거나 감상할 때 다기류인지 다기류가 아닌 잡기인지로 선입견을 가진 상태에서 구분한다.
이번 호는 센노리큐에 대한 도입부이며 다음호에서는 일본다도사에 등장하는 다기들과 센노리큐와의 관계에 대한 것을 알아보기로 한다.

월간다도지 9월호에 실린내용이며, 종전과 마찬가지로 도서출판 리수의 '일본의 다도문화'(근간)의  내용을 사전에 발췌한 것입니다. - 비봉 -

일본다도문화사 제9회
■ 보론 - 센노리큐의 재조명

  차를 즐기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기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지난 호부터 세 번에 걸쳐 센노리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바 이번 호에서는 일본 다도계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은 센노리큐와 그의 다기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센노리큐가 어떠한 미학으로 다기를 보았는가에 대한 현대적 해석은 많은 부분이 후세에 확대하여 덧붙인감이 적지 않으므로 먼저 그의 글이나 그 자신이 소지하였던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판단의 기준이 될 것이다.
 필자가 재일중이던 수년전에 다행스럽게도 그의 친필서한이 발견되어 그동안의 필자의 주장이 가설에 그치지 아니하고 어느 정도 근거를 마련해준 바 적지 않아 매우 고무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이미 리큐의 활동기에 당시로서는 일종의 감정서 내지는 평가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는 센노리큐의 친필 서한주1)이었다. 이 서한은 센노리큐에게 어느 영주가 자신이 도자기를 구입하려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지를 문의한 것에 대한 답변으로서 그 내용의 핵심은 "최근에 만들어진 신품이고 더구나 그것은 일본국내산이기 때문에 굳이 고가로 구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실로 지금까지 미화된 리큐의 미학과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을 엿볼수 있는 사료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와비의 정신으로 본다면 단지 일본 국내산이므로 고가로 구입할 필요가 없다는 대목에는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동안 본지 연재중의 본문에서도 필자가 밝힌바 있듯이 리큐의 기물에 대한 관념에는 후세에서 말하는 기물 자체의 미적 순수성보다는 명물이나 수입 카라모노에 대한 선호가 배어있었음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더욱 와비차의 개념으로 판단해 본다면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다기라는 것도 없으며, 또 단지 다기라는 이름만으로 절대적 미적 가치가 높고 그 자체가 고가를 형성하여야 할 이유란 어디에도 없다. 더구나, 당초부터 일본의 다도 다시 말해 차노유라 일컬어지는 말차도의 생성초기에 일본 국내에서 다기용으로 쓸만한 도자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리큐의 사후에 활동한 다인들도 다기에 있어서 만큼은 리큐와 그리 뚜렷할 정도로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새로이 취사선택한 다기를 사용하기 보다는 전시대에 활동한 선배 다인들의 애장품이나 소위 골동다기를 더욱 선호했던 것이다.

주: 1) 이 서한은 1990년대말경에 우리나라의 고미술 감정과 관련한 TV프로그램인 [진품명품]보다 역사가 오래된 프로그램인 [뭐든지 감정단(何でも鑑定團)]이라는 곳에서 소지자의 감정요청에 의해 리큐가 직접 쓴 서한으로 소개된 바 있다.

 센노리큐의 사후이긴 하나 이미 17세기초기부터는 본격적인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던 임진 6요(壬辰六窯)주2)의 존재까지도 감안한다면 무로마치바쿠후 때부터 태동한 일본내의 새로운 형식의 다도정신 그야말로 일본의 다인들이 와비차라 부르는 다도미학에 입각해 보면 충분히 다기로서 사용가능한 일본 국내산 도자기들이 많이 존재하였음에도 실상은 그렇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비록 중국산에서 조선산으로 수입원은 바뀌었을지라도 엄연히 외국제품인 카라모노의 선호경향은 센노리큐처럼 상인출신들로 구성되었던 당시의 차장(茶匠)들의 배경과 그들 나름대로의 다기중개에 따른 이익추구 등이 함께 연동된 탓이 컸다고 보인다. 때문에 당시의 수입다기들은 모두가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었고 또 그러한 고급명물다기들을 소유하고 있어야 차장으로서의 명성도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일본의 현대도예계를 비롯한 고미술업계에서는 다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 고가로 골동품을 판매하였다. 어지간한 부호하고 견주어도 보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재력을 가진 각 다도유파의 이에모토(家元)들은 사실 손쉽게 구입할 수 있기도 하였다. 아울러, 골동상과 연계된 일본의 다인들은 다기류를 거래할 때 가격의 흥정 자체가 자칫하면 자신의 심미안의 부족으로 나타날까 두려워 거의 호가대로 사는 경향이 많은 등 여러 사유로 인해 결과적으로 이들 다기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2) 임진6요란 임진왜란 당시 도일한 도공집단이 개요하여 오늘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대표적인 6대 도자기를 지칭하는 말로서 필자가 재일기간중 연재하던 [한국고미술]지에 처음 발표한 이후 사용하고 있는 용어이다. 일본용어로는 분로쿠(文祿)6요라 사용하고 있다. 카라츠도자(唐津燒), 아리타도자(有田燒), 사츠마도자(薩摩燒), 하기도자(萩燒), 아가노도자(上野燒), 다카토리도자(高取燒)가 바로 그것이다. 

  결과론적으로 고급 내지는 미적 감각이 우수한 예술품들이 제대로 평가받아 고가가 되었는데, 사후에 보니 대부분 다기가 최고급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도 해석하는 일본학자도 있긴하나, 사실 각 시대의 다인들의 손에 의해 사용된 도자기는 고가로 거래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문화재로서 지정될만한 가치도 생겨나게 되었음을 간과하여서는 아니 된다. 
  최근 우리나라도 일부 그러한 경향이 보이기 시작하고는 있지만, 일본은 더욱 극심하여 한 작가의 손에 의해 동일한 태토로 만들어 졌음에도 다기류들은 일반적인 용도의 도자기보다 별격의 취급을 받으며 또한 다도구 전문점 등을 통하여 고가로 버젓이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한 현상은 실로 일본적 특성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사실 환율차이로 인한 결과이긴 하나 국내의 작가들이 일본에서 자신의 작품을 고가로 전시판매할 수 있었던 것도 다름 아닌 다기분야였다. 하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일본 국내작가들의 다기가격과 비교하면 일본의 다인 입장에서는 저가에 속하는 다기이기 때문에 손쉽게 판매되기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일본의 문화재급 다기중에는 우리나라 조선시대초기인 15세기경에 주로 제작되었거나 대체로 그 전후 100년을 상하연대폭으로 제작된 도자기가 카라모노로서 수입되었고 그것이 근현대 일본의 다도융성기에 선조 다인들의 애호품이었다는 역사적 배경이 함게 작용함으로써 고미술경매시에 최고가를 경신하며 재벌애호가들의 손으로 이동한 후 거의 대부분이 지금은 미술관의 전시품으로 되어버림으로써 일반서민이나 그저 차를 즐기는 다인들의 손에들어올 길이란 완전히 없어져 버리게 된 셈이다. 그러던 차에 일본에서 소위 이도(井戶)라 불리는 다완류가 한국작가의 손에서 재현이라는 미명하에 모방작들이 양산됨에 따라 문화재급 다완을 구입하지 못하던 대다수 일본 다인들에게는 문화재와 유사한 작품을 사용한다는 대리만족을 시켜줌과 동시에 현대 일본의 저명작가의 다기류와 비교하면 훨씬 저가이므로 입맛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최근의 국내작가들이 일본에서 전시판매가 예전과 같지 않음은 이러한 현상하에 수요를 갖고 있던 일본의 다인들에게 이미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지난 수십년간 유사한 다완류를 대량으로 제작 판매한 결과로 식상한 면도 있을뿐더러 일종의 공급초과현상을 보임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 판단된다. 그리고 그 부정적 영향은 현대 한국 다기류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음은 매우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 다도사에 있어서 다양한 사유로 인해 다기가 고가를 형성하게 된 것이지, 애초부터 완전한 예술품을 사랑하는 일본인 내지는 센노리큐나 기타 일본의 선조다인들의 미학 내지 심미안이 발달하였기 때문만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일례로, 메이지유신 이후 대략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국내산의 국보급 명품 도자기들은 안목있는 외국인 수집가를 통해 해외로 많이 유출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문화재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었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재가 귀함을 모르고 있다고 야나기무네요시를 비롯한 일부 지식인이라 자처하던 일본인들이 지적하던 그 기분 그대로 필자의 눈에는 마찬가지로 일본의 당시 지식인들이 예술적 심미안이 뛰어나 자신의 문화재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였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결코 전통예술을 사랑하는 다인이라면 일본인들은 비싼 도자기라도 선뜻 사는데 우리나라사람들은 도자기의 예술성을 몰라 비싼돈을 치룰줄 모른다는 식의 논조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나라에 관광 온 일본인들이 고가라도 살수 있는 것은 그 도자기의 예술적 가치를 볼 수 있는지 유무와 무관하며 엄연한 한일간의 경제력차 다시말해 환율로 인한 가격의 상대적 저가의식으로 인한 것임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도자기들중에서도 최고명품들은 모두 일본에 모여진 것이 도자기나 예술품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라는 논지 또한 반드시 그렇지만은 아니하였음을 알아야한다. 그 이전에 동남아시아로부터 수입된 도자기는 다기류외에는 거의 없었고 또 일반 다도구가 아닌 일반 예술공예품이 현대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것은 다도의 유파들을 중심으로 대대로 계승되며 보존될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상황에 따른 것이지 모든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문화재를 사랑할 줄 알기 때문에 수백년전의 것이 남아있고, 중국이나 우리나라 등지에서는 사랑할 줄 몰라 남기지 못했다는 식의 논리는 때문에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정말로 일본인이 중시하였다면 다기류를 제외한 여타 동시대의 많은 카라모노들도 남아있어야 정당한 논법의 전개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대부분 명품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은 일본의 다이쇼시대에 우리나라와 중국 대만 등지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던 때에 가장 많이 그리고 아무런 제한없이 자유롭게 도굴되거나 매집되어 일본으로 유출된 것들이 거의 대부분임을 기억하여야한다. 그것을 현재 시점에서 분석하고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너무 주제에서 벗어난 지는 모르겠으나 다기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마치고 이제 이야기를 되돌려 센노리큐와 히데요시간의 끈끈하던 밀월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게 된 결정적 사건을 살펴보자. 이것은 다름아닌 텐쇼우(天正) 19년(1591) 정월에 히데요시의 최측근이자 이해자요 막강한 권력자였던 히데요시의 이복동생인 히데나가(秀長)의 죽음이다. 이는 히데요시정권하에서 센노리큐에 대한 최대의 정치적 옹호자이자 후원자가 동시에 사라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이 사건은 일본 정치사적으로 판단해볼 때 히데요시의 밀실정치, 측근정치의 막을 내리게 하는 신호탄이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 당시의 상황은 센노리큐가 히데나가의 사후 한달 정도 지난 때에 그가 없어짐으로 인해 매우 곤란한 지경에 빠졌음을 토로하는 내용의 편지를 그의 제자인 호소카와산사이(細川三齊)에게 보낸 것을 통해서도 생생하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그 해 2월 28일 센노리큐는 다이토쿠사(大德寺)의 산문을 기증할 때 자신의 목상을 그 위에 걸어 올린 불경죄와 자신의 지위명성을 이용하여 신품의 다기를 고가에 속여 팔아치워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부정죄라는 두 개 죄목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는 조선시대때의 사약하사제도와 유사한 셋부쿠(切服)의 명을 받자 그 유명한 [인생칠십(人生七十)...]으로 시작되는 문구 주3)를 남기고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울러 다이토쿠사의 소우친(古溪宗陳)도 산문의 불경죄에 함께 연좌되어 큐슈로 유배되고 만다.

주: 3) 이에 대해서는 제설이 있지만 중국 성도(成都)의 고승 한리휴(幹利休)의 유게(遺偈)로부터 따온 문구라고 하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센노리큐에 대한 마지막호에서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부분을 중심으로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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