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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걸명소(乞茗疏)

 

乞茗疏 乙丑冬 贈兒菴禪師. 정약용의 인장

旅人近作茶號밑食 書中妙벽(*璧자의 밑에 玉없는 벽) 全通陸羽之三篇 兼充藥餌 病裡雄蠶 遂竭盧仝之七椀 雖浸精瘠氣 不忘기(*其밑 실 사)毋경(*日巨밑火)之言 而消壅破煩 終有李贊皇之癖水+自乎 朝華始起 浮雲효효(*白이 셋 합자한 밝을효)於晴天 午睡初醒 明月離離乎碧澗 細珠飛雪山燈 瓢紫筍之香 活火新泉野席 薦白包之味 花瓷紅玉繁華 雖遜於水+路公 石鼎靑煙澹素 庶乏於韓子 蟹眼魚眼 昔人之玩好徒深 龍團鳳餠內府之珍頒已경(*聲에 耳대신 缶,磬임) 玆有采薪之疾 聊伸乞茗之情 竊聞苦海津梁 最重檀那之施 名山膏液 潛輸瑞草之魁 宜念渴希 毋心+堅波惠.



걸명소. 을축년(*1805) 겨울 아암선사에게 드림.

객지인이 근래 차를 탐하는 도철을 해서 글가운데 묘법은 육우의 차경 세편을 모두 통했고 약먹이도 겸해 하고 있습니다 병病속의 큰 누에 버러지가 드디어 노동이 일곱잔을 마시던 데까지 잠식하게 되었으니 비록 척기瘠氣가 정精을 침입한다는 기무경의 말을 잊지 않으나 막힌것을 사그리고 번민을 깨는 끝내 이찬황의 차즙 대어보기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지 않습니까 아침 햇살에 비로소 일어나니 뜬구름이 맑은 하늘에 희디희고 낮잠에 처음 깸에 밝은 달이 산골 푸른물에 저만치 떠있으며 잘은구슬과 날리는 눈 산의 등불에 자순차紫筍茶의 향을 바가지 뜨고 살은 불에 새로 길은 샘물의 들 자리에 하얀 꾸러미의 맛을 드려 올리니 홍옥같은 꽃자기의 번화함은 비록 로공보다 손색있으나 돌솥에 푸른 연기의 담백함은 거의 한자韓子에 빠질듯 합니다 해안과 어안의 옛사람들이 완호하던 것은 공연히 깊고 용단과 봉병 내부에서 진귀히 내려주신 물건은 이미 텅텅 비고 여기 나무하다 난 병이 있어 어떻게 좀 차를 구하는 사정을 폅니다 개인적으로 듣기에는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나루는 보시의 베품을 가장 중히 한다합니다 명산의 기름진 액이 몰래 상서로운 풀의 우두머리에게 보내 졌으니 마땅히 목마르게 바람을 생각해 혜택을 파급하시는데 인색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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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號밑食)는 도철의 도로서 재물을 탐하는 것을 도라 하고 음식을 탐하는 것을 철이라 하는데 보통 합해 도철이라 한다 좌전의 문공 18년의 글에 일찌기 진운씨에게 재주없는 아들이 있어 음식을 탐하고 화유貨貝+有를 무릅써 천하가 도철이라 불렀다 하고 여씨춘추에는 말하길 주나라 솥에 도철의 문양이 있어 머리는 있고 몸이 없으니 사람을 먹는데 목구멍을 넘기지 않아 해가 그 몸에 미친다 했다.

*노동은 당의 시인 옥천자로서 맹간의에게 차를 받고 보낸 시에 칠완의 내용이 나온다.

*기무경은 대당신어에 나오는 우보궐右補闕 무경이니 그는 차가 하루 잠시 주는 이익이 있지만 척기가 정을 침하는 종신의 해가 있다고 경계한 말이 전한다
전당시에 나오는 시인 기무잠(692-약749)이 무경과 같은 사람 이거나 차산은 동일인으로 본것 같은데 기무잠의 기무는 복성復姓이며 기무잠은 당의 형남사람으로 일설에 건주인이라하며 자는 효통孝通 혹은 계통季通이라 하며 일찌기 우습유右拾遺를 맡고 저작랑까지 지냈으나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여 왕유와 서로 수창하며 시 또한 산림의 고적한 경지를 잘 나타내었다 한다.

*이찬황(787-850)은 당의 재상을 지낸 이덕유李德裕로서 그는 조군사람인데 자는 문요文饒 길보자吉甫子라고 하며 찬황贊皇이란 호는 당 무종때도 재상을 하며 지방세력을 깍고 황권을 높이는데 극력하고 재상을 한데 관계되어 보인다 그 또한 멀리 혜산물을 길어 먹었으며 차에 감식안이 높았으며 차즙을 육식에 부어 시험해 본 일화가 전한다.

*뜬구름이 갠 하늘에 효효하다(浮雲효효於晴天)함은 차경의 오지자五之煮 편에 "또 개인하늘의 시원 명랑함에 뜬구름이 있는거와 같아서...(又晴天爽朗 有浮雲)"라는 구절이 있으며 효효도 곧 이 편의 파파연(白+番 흴파)과 같은 말이다 리리연離離然은 순자 비십이자편에 "사업에 노고하는데서는 려려연 리리연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걸릴리의 뜻이 아니고 거리해 떨어져 있는 모습이다 즉 위 두구절은 모두 아침에 일어나서 말차를 저어 마심에 찻물에 흰꽃이 구름처럼 일어나는 모습과 저녁에 깨어서 푸른찻물에 달이 비친모습을 말하는 것이기도하다.

*세주細珠는 가루차를 탕에 붓고 저을때 이는 물방울이고 비설은 연자에 병단차를 갈기위해 연륜을 굴려 날리는 가루를 말한 것이며 산의 등불은 당 황보증의 육홍점 산인이 차따러 가는 것을 보내며 라는 시에 들밥에는 돌샘물 맑고 적적한 등불밤이란 싯구가 있다.

*참새 참꽃하면 새중의 진짜 새 꽃중의 참된 꽃 뭐 이런 의미로 부르는게 아니라 그 용례를 보면 단지 서로 비슷비슷해 통털어 부르기 쉬운 작은 새무리중에 별난 한 종류를 말하고 철쭉중에 독이 있는 여름철쭉과 구별해 식용하는 봄철쭉을 지칭해 말하는 것임을 알수있다 엽차 또한 마찬가지로 특히 말차와 상대적 개념을 두고 부른 말이다 청송 취죽처럼 차나무잎이 푸르니 녹차라 하는가 보다 하거나 또는 국화차 생강차등의 광의의 다른 차개념과 염두해 녹차라 구별해 말하는 순무식은 없을듯한데 그래도 문외한들을 차밭에 몰아 놓아보면 무조건 녹차, 녹차밭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녹차라하면 특히 증제불발효처리로 가급적 엽록색을 살려 고정시킨 것으로서 여타의 다른 발효차, 특히 서양의 홍차와 스스로 상대적 개념을 두고 부르는 한 상품명으로서 외국의 증제차를 위주하는 곳에서 지칭 선전하는 것에 따라 근간에 우리에게도 일컬어지기 시작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찻물이 붉기에 홍차라 부르는 것 그 또한 정작 서양에서는 가공된 발효차잎이 검다해서 블랙티라 부르는 것으로 알고있다 이래서 상품추구의 경향도 자연히 엽녹색을 위주로 대표해 나가게 되고 비록 불발효차라해도 자주싹이나 순은 녹차상품에 장애요소로 고려되어 보통 취용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아는데 그러나 녹차의 일반 제법이 중국의 명대에 쪄서 만들었던 나개차 방식을 따름에 잎이 점차 자라 퍼지는데 따라 당연히 더 푸르져가는 것에 기초해 만드는 것과 달리 여린 것을 귀히했던 옛날부터 차의 자주싹이나 순은 녹색보다 오히려 적지않은 존중을 받아 온 만큼 만약 따로 자주것으로 골라 따모아 불발효차음을 만든다면 이는 녹차라 말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색의 개념도 다같이 사이색 이지만 녹綠이 황과 청의 간색間色인데 비해 자紫는 어두운 색과 붉은 색의 간색으로 개념도 상반되는 바가 있다 하겠다 차의 자주싹은 고산의 척박한 땅에 잘 나며 그 기미도 박하다 한다 즉 초목이 가뭄에 메마르고 탄 색에 가까운 것 같다 역시 차나무를 대나무 속에 키우거나 그늘을 지워 생장에 제한이 된 것과 비슷한 이치라 하겠다 아芽는 가지의 눈에서 나는 것이고 순은 죽순처럼 땅에서 오르는 것이다 대정기에 보면 건녕땅이 차세액이 가장 많은데 탐춘探春 선춘先春 차춘次春 자순紫筍의 네 품등이 있다고 했다.

*소동파의 시원전차시에 살은불에 새샘물을 귀히하고 로공의 차다리기가 서촉을 배워 정주의 꽃자기는 홍옥을 쪼은듯 이란 구절이 있으니 활화活火는 불꽃을 지닌 불을 말하며 뒤의 해안 어안도 탕을 끓일때 차례로 생기는 게눈알 고기눈알같은 작고 큰 기포로서 앞구절에 나온 세주 비설과 함께 역시 소동파의 위 시에도 나온다.

*한자는 당의 남양사람 한굉으로 자가 군평, 덕종때 중서사인을 했으며 대력십재자의 한사람이기에 한자라고 한 것이다 그의 잘 알려진 한식시에 푸른연기가 다섯제후의 집에 흩어 든다는 구절이 있다.

*용단 봉병은 송나라 웅번의 선화북원공차록에 보면 개보말년(968-976)에서 태평흥국초(976-983) 그러니까 976년경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 하며 찻가루를 덩어리 한 것에 용봉의 무늬를 찍은 상품말차로서 단團은 경단으로 둥근 것이고 병餠은 호떡처럼 둥글 납작한것인데 보통 용단과 봉병으로 만들었다 명나라 초 홍무24년(1391)부터 진상이 금지되고 엽차인 차아茶芽로 고쳐 올리게 했다 여기서 내부內府에서 준 용단 봉병은 물론 아암이 준것을 소문疏文의 형식에 따라 비유해 말한 것으로 호남에 엽전 모양의 돈차가 전한다하니 역시 이때 단병 형태의 말차를 만들어 주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 이른바 전통차라하면 볶아 우려내는 불발효엽차를 알고 말하지만 이는 비록 근래 광범위하게 퍼지고 깊이 박혔을지 몰라도 결코 묵은 뿌리는 아니며 수천년 우리 차음역사에 비하면 십분의 일도 안되는 아주 근세에 비롯한 일로 그 대표자는 바로 초의며 더우기 요근래 수십년에 증제불발효차와 같이 확산된 것으로 고려도경의 글이나 조선중기 허준의 동의보감등에 보더라도 쭈욱 말차였다 .

*채신지병采薪之病은 곧 예기 곡례편에 나오는 부신지우負薪之憂로 군주에게 자신이 나무하다가 몸살나서 지금 명에 응하지 못한다는 뜻의 자신을 낮추어 한말이다 이것이 맹자에서는 채신지우采薪之憂라는 말로 나타나는데 우憂는 병病의 뜻으로 채신지우나 채신지병 그리고 부신지우가 다 같은 말이라 할수 있는데 이 말들의 뜻을 살펴보면 시경 주남편의 여분시에,
여수의 큰 제방을 따라 그 졸가지 친다
군자를 보지 못하니 마음주림이 아침끼니를 거른듯
여수의 큰 제방을 따라 그 움가지 친다
이미 군자를 보니 나를 아주 버리시지는 않으셨다
방황어는 꼬리 빨갛게 닿고 왕실은 불난집 같아
비록 불난듯 하여도 부모 대단히 가까이 계시네. 하였으니 시란 당사자의 입장에 따라 기본적 바탕위에 각자 각색해 언지 할수 있는 것이지만 여기서 채신지우란 곧 걸명소 첫구절에 차산이 유배지로 떠돌게 된 자신을 려인旅人이라 한 것과 통하여 다시 왕명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수있으며 대국적으로 보면 차산은 비록 추사처럼 거듭 쫓겨나고 영 버려지게 되다시피 한 것은 아니고 후에 유배에 풀려 조정에 돌아가 승지의 벼슬 까지 받았지만 결국 나무하다 든 병이 깊어진 셈이 된듯 오래 임무를 맡지 않고 그만둔 것처럼 되었다 할수 있겠다.

*소疏는 성글게 틔운다는 뜻인데 곧 이로 사정을 통하게 한다는 뜻으로 후에 군왕에게 올리는 글을 소라했다 손초가 차를 보내는 글에 역시 차를 의인화 해서 만감후晩甘侯 열다섯 사람을 시중하는 재각에 보낸다는 내용이 전한다.

*당의 시인 두목의 제의흥차산시 첫구에 산의 열매는 동쪽 오땅이 빼어나고 차는 상서로운 풀의 괴수라했다.

*뜻이 대충 통하는 걸 보아 크게 본의에 어긋나는 오자나 탈자는 없는듯 한데 다만 원문을 직접 보지 못하고 문맥을 따라 추측해 글자를 고쳐 넣은게 적지 않으니 더구나 이로 확정할수없다 을축년 초 정순왕후가 죽자 다산은 시국이 바뀌어 이로 유배에 풀려 새로 털고 나설 것을 기대하는 청운의 꿈으로 자축하는 듯하니 역시 이글이 한편으로 은근히 조정에 올리는 글과 같게 되었다.

 

*1801년 정약용 강진유배.
*1805년 정약용 걸명소 지음.
*1818년 정약용 유배에 풀려 돌아가게 되자 18명의 남은 제자들이 차신계를 모음 이 차신계절목에서 정약용이 볶은 엽차와 말차인 단차를 언급함.
*1830년 정약용의 사문제자인 장의순이 포차식의 내용인 명나라 장원의 차록을 전재했던 만보전서의 채차론을 지리산 칠불선원에서 차신전으로 정서함.
*1836년 정약용 졸.
*1837년 장의순 18수의 연시로 된 동차송 지음.
*1840년 김정희 제주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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